[제3회 民世賞 수상자 선정] "학자라면 연구실에서 天壽 다해야"

50년간 한국사 연구에 매진…
역사 뿌리캐다 민세의 지혜 배워
"현장도 좋지만 지나치면 역효과"

"학자란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기성 가치에 얽매이면 안 되고, 이데올로기에 매몰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학문을 현장에서 실천하겠다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런 사람이 너무 많으면 학문이 원숙해지질 않아요."

한영우(74)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우리나라에 교수는 많은데 학자는 적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폴리페서(현실정치에 뛰어드는 교수)'를 향한 쓴소리였다. "현실에 관심을 갖되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연구실에서 천수(天壽)를 다하고 가는 사람이 학자"라고 했다.

수상 소감을 묻자 "상 받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하다가 "민세 안재홍 선생은 내가 워낙 좋아하는 분 아닙니까"로 넘어갔다. "한국 선비사상은 단군신화의 홍익인간에 뿌리를 두고 민세의 '다살이', 즉 만민공생(萬民共生)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민세는 광복 직후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신민족주의(열린 민족주의)를 주창했어요."

한영우 교수는 조선시대를 비롯한 한국사를 50년 가까이 연구한 원로 국사학자다.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장, 규장각 관장, 서울대 인문대학장 등을 지냈다. 우리 역사에 대한 개설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을 이끈 전통사상을 선비정신으로 풀어낸 '한국선비지성사' 등을 펴낸 그는 "우리 역사학의 뿌리를 캐다가 민세를 만났다"고 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를 민세로부터 배웠습니다. 큰 틀인 총론은 지속성을 가지고 가되 변화에 따라 각론을 다듬을 줄 아는 것이지요. 뿌리가 약한 요즘 지식은 폭발했다가도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학문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못마땅해했다. 한영우 교수는 "학자는 단기적 처방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면서 "발등에 떨어진 문제만 보지 말고 10년, 20년, 100년까지 미래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에게도 "씨도 안 뿌렸는데 열매를 거둘 수는 없다. 멀리 보고 벽돌 한 장씩 쌓아가는 자세로 작게 시작해도 된다"고 조언했다.

오늘날 사회 갈등을 극복하는 길도 민세 사상에서 찾는다는 그는 "좌우 갈등을 지양한 민세의 신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고 시대 변화에 맞게 다듬으면 된다"고 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보면 사실 어렴풋이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빅3'의 노선이 이름만 가리면 누구 것인지 몰라요. 흑백으로 갈라졌던 과거와 달리 이젠 오십보백보인 겁니다."

한영우 교수는 "중도(中道)야말로 우리나라 지식인의 표준적인 정서"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회색주의인데, 난 회색이 가장 세련된 색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가치가 아니라 이익에 따라 요리조리 가는 기회주의와는 다릅니다. 회색주의는 양극단을 극복하려는 시도지요. 공자가 말한 중용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영우 교수는 요즘 연구실에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1만5000명을 분석한 '족보를 통해 본 문과 급제자의 신분이동'이라는 책(전 4권)을 집필 중이다. '조선시대는 전주이씨 안동권씨 밀양박씨 등 소수 가문이 벼슬을 독점한 폐쇄된 사회였다'는 기존 이론을 통계적으로 부정하는 작업이다. 한영우 교수는 "실록, 족보, 인구통계 등 오만 가지 자료를 찾아 문과 급제자의 신원을 조사했다"면서 "학계에 상당한 충격이 될 것"이라고 했다.

[수상자 선정 취지] 한국근세사 새 지평 연 원로

한영우 이화학술원장은 일찍이 1980년대 후반부터 민세의 신민족주의론을 깊이 연구해 안재홍 사학 연구의 지평을 선구적으로 넓혀 놓았다. 또 ‘한국역사’ ‘한국선비지성사’ 등의 저술을 통해 한국통사에 대한 사학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정리해 반영하는 한편 한국사를 대중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는 민세의 조선학 운동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만장일치로 수상자로 결정한다. /심사위원 조동일·남시욱·정윤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