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팝 컬처] '수학 영재'가 재즈 피아니스트 된 까닭

재즈 피아니스트 고희안은 월간지 '재즈 피플'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모범생'이란 나를 지칭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성적표 한 번 보자고 하신 적 없고, 사고 한 번 친 적 없으며,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으며, 항상 제일 먼저 학교에 도착해 도서관으로 직행했고, 2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10분 내에 해치우고 점심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수학 문제 푸는 즐거움에 이과를 선택했고 하루 종일 1970년대 도쿄대 수학 문제 푸는 것이 내 취미였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였고 꿈이었다. 난 순응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10대를 보내던 모범생 고희안은 어느 날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듣고 그 매력에 빠져버렸다. 미국 영화 '사랑의 행로'의 사운드트랙이었다. 제프 브리지스가 피아니스트, 미셸 파이퍼가 재즈 가수로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음악은 '재즈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재즈를 들려준다. 고희안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내 인생의 롤 모델은 제프 브리지스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음반 6장을 낸 재즈 밴드 '프렐류드'를 이끄는 고희안은 최근 '고희안 트리오'라는 팀을 따로 결성해 첫 음반을 내놓았다. 유명 재즈곡 12곡을 피아노와 베이스·드럼의 단출한 구성으로 녹음한 음반이다. 이 음반을 출근할 때도 듣고 퇴근할 때도 들었다. 집에 가서도 오디오에 걸어놓고 '전체 반복' 모드로 줄기차게 들었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이렇게 계속 들으면 물리는 법인데, 고희안의 피아노는 들을 때마다 새로웠다. 이윽고 그의 밴드가 매주 월요일 공연하는 서울 대학로의 재즈클럽에 찾아가 라이브 연주까지 들었다. 음반을 들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손님 중에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일본인이 있어, 즉석에서 그와 협연도 했다.

클럽 공연이 끝나고 고희안과 마주 앉은 뒤에야 그의 피아노가 들을 때마다 새로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교생 때 도쿄대 수학 문제를 즐겨 풀 만큼 수학을 좋아했던 그는 피아노 연주에 수열(數列)의 원리를 도입했다. 이를테면 'C메이저7' 코드는 도·미·솔·시의 네 음으로 구성돼 있다. 네 개 음을 배열하는 방법은 4!(팩토리얼)로, 4×3×2×1=24이므로 24가지가 된다. 화음 하나를 칠 때도 무려 24가지로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미국 버클리 음대에서 피아노를 공부할 때 이 방법을 생각해낸 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해왔다"고 말했다. 그의 즉흥 연주가 매번 새롭게 들리는 비결이 거기에 있었다.

고교 2학년 때 재즈를 처음 접한 그는 고3 들어 '수학 문제 푸는 것 말고 내가 원하는 것, 내 인생을 걸 바로 그것'을 찾기 위해 한 달간 수능 공부를 중단했다. 한 달 뒤 그가 내린 결론은 "음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음대에 진학하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재수를 택할 것인가 일단 대학에 갈 것인가 고민한 끝에 그는 고려대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에 들어가 전공과는 상관없는 클래식 피아노 레슨도 받아봤고, 머리를 기르고 록 밴드에서 키보드를 치기도 했다.

2학년을 마친 뒤 군대에 다녀온 그는 과감하게 학교를 자퇴했다. 미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끊어 보스턴으로 날아갔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사람들은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쳐도 성공하기 힘든데 스물다섯 살에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거냐"고 했지만 그를 말릴 순 없었다.

버클리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그는 뉴욕대에서 재즈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2005년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 그는 자신의 밴드 '프렐류드'와 '고희안 트리오'를 이끄는 것 말고도, 영화음악과 미디어 아트, 대학 강의를 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생전의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참석해 젊은이들에게 '점을 잇는 것(connecting the dots)'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젊은 시절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다양한 것들에 매료됐고, 나중에 되돌아보니 점(點)처럼 찍어왔던 그 경험들이 하나의 선(線)으로 연결돼 있었다"며 "미래를 내다보며 점들을 이을 수는 없으므로 여러분은 그 점들이 언젠가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희안은 어렸을 때부터 "악기 하나, 운동 하나, 외국어 하나만 잘하면 된다"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았다. 수학을 좋아했고, 우연히 재즈를 접했으며, 대학을 자퇴했고, 포병으로 군 복무를 하다가 군악대에 차출된 일들이 모두 서로 무관해 보이는 '점'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자신의 직관을 따라간 결과, 그 점들이 이어져 주목받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그는 "만약 네 살 때부터 음악 조기교육을 받았더라면 지금처럼 행복하게 음악을 하고 있을까"라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남이 좋아할 만한 일'들로 '스펙 쌓기'에 골몰하고 있는 20대들에게 고희안의 음악을 권해주고 싶다.

기획취재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