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 그림 그리듯… 양탄자에 상상력을 수놓다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한 선, 기계로 짜낸 획일적인 무늬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디자이너가 있었다. 그는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뛰어놀던 잔디밭의 폭신한 감촉과 나뭇잎 위에 내려앉은 이슬방울의 볼록한 양감, 꽃망울을 갓 터트린 장미꽃잎의 질감과 교회 예배당 바닥에 깔린 돌의 울퉁불퉁함까지 고스란히 구현한 그런 디자인을 꿈꿨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세계적 양탄자 디자이너 나니 마르키나(Marquina·55)의 작품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7년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 러그 회사를 세운 뒤 25년간 여러 실험적 작품을 만든 마르키나가 이달 초 한국에 왔다.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강연을 하기 위해서다. 서울 청담동 한 매장에서 만난 마르키나는 "1980년대 당시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디자인은 나날이 진화했는데 유독 양탄자만 옛날 형태 그대로임을 알았다. 2차원의 평면을 통해서도 3·4차원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 양탄자 디자인을 시작했다"고 했다.

마르키나가 처음부터 수작업을 고집했던 건 아니다. 초창기엔 자신의 스케치를 기계로 짜서 옮기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마르티 귀세(Guixe), 하비에르 마리스칼(Mariscal) 같은 스페인의 대표적 산업 디자이너와 협업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추구했지만, 기계로 짜내는 단순한 방식으로 상상력을 온전히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마르키나는 "1990년대에 디자인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했다. "우연히 인도로 여행을 떠난 게 시작이었다"고 한다. 인도의 작은 마을 보팔(Bhopal)에서 그는 베틀로 양탄자를 짜고 수를 놓고 색실을 엮는 장인들을 만났다. 마르키나는 "장인들을 만나자 머리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오랜 갈증을 풀 방법을 그들을 통해 찾았다"고 했다.

마르키나는 인도의 장인들과 손을 잡고 직물을 일일이 오리고 깎고 붙이고 엮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존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재를 해석하고 디자인을 입힌 것이다. 스페인의 대표 작가, 신진 디자이너와의 협업도 계속했다. 격자무늬의 알록달록한 천을 손으로 꿰맞춘 듯한 느낌의 '쿠아드로스(Cuadros)', 꽃송이를 하나하나 그려 넣은 것처럼 보이는 '칼라(Kala)', 장미꽃잎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 들판을 그대로 구현한 '로제(Roses)', 낮은 언덕과 잔디밭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은 '하늘을 나는 양탄자(Flying Carpet)' 같은 작품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나왔다.

마르키나는 "단순히 디자인이 예쁜 양탄자를 넘어, 울림을 담은 양탄자를 만들길 희망한다"고 했다. "고대 때부터 양탄자는 당대의 사회상과 서민들의 소박한 꿈을 담아내는 도구였어요. 최근에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했는데, 무기와 탱크가 가득 새겨진 양탄자가 있더군요. 전쟁에 짓밟힌 이들의 아픔이 양탄자로 표현된 거죠." 남극 바다 위에 떠내려가는 빙하와 그 위에 애처롭게 선 백곰을 형상화한 '지구 온난화', 자전거 폐타이어를 자르고 엮어 만든 '자전거' 같은 작품도 그렇게 나왔다.

마르키나는 "상상력을 표현하는 것도 용기라고 믿는다"고 했다. "디자이너는 머릿속 꿈을 현실세계로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요. 제가 작은 양탄자 하나에도 힘을 쏟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러그 스타일링 이렇게]

복잡한 공간일수록 무늬보다 질감·빛깔에 포인트를

나니 마르키나는 “양탄자를 처음 집에 두는 경우라면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둥근 조약돌을 연상시키는 작은 카펫도 괜찮아요. 아이 방에 한두 개 깔아놓거나, 거실에 몇개 두면 그것만으로도 공간에 표정이 생기죠. 익숙해지면 천천히 큰 작품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양탄자를 두는 공간의 인테리어가 복잡할수록 디자인은 간결한 것을 두는 게 좋다고 한다. 무늬보단 빛깔과 질감으로 포인트를 주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반대로 공간이 단순하고 휑하다면 대담한 무늬의 양탄자를 고르는 것도 괜찮다.

나니 마르키나는 “양탄자를 아예 벽에 그림처럼 걸어놓아도 멋지고, 서로 다른 무늬의 양탄자를 한데 놓아도 생각보다 근사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