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시아버지의 김장김치
입력 : 2012.11.26 21:29
인생 2막에 발견한 요리 본능 '까짓것~ 김장 김치가 대수랴'
식재료 마련 위해 텃밭까지 일군 시아버지, 김치 비법 전수 나서
'살림은 사람을 살리는 일…그걸 모르면 사는 맛도 줄지'
"이번 김장엔 하루 휴가 받아 내려오너라. 열 일 막살하고 내려오너라."
시어머니 아니고 시아버지였다. 며느리에게 직접, 그것도 직장으로 전화를 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시아버지를 알현하는 일이 1년에 서너 번이나 될까. 마주친다 한들 "왔냐" "됐다" "가라" 단 세 마디뿐이던 당신이었다. 게다가 두 일도 세 일도 아니고, 열 일 제치고 내려오란다. 연말이라 할 일이 태산인데도, 그 준엄하고도 단호한 영(令)에 "바쁜데요" 소리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다 도로 기어들어갔다. 대신 남편을 몰아친다. "내가 쓰러진 소도 일으킨다는 인삼낙지라도 먹는 줄 아시는 거야? 애 둘 키우며 직장 다니느라 몸이 아작날 판인데, 김장, 그것도 60포기가 웬 말이냐고오~."
#
해병대 출신에 도청 공직자로 은퇴한 것을 당신 인생의 빛나는 훈장으로 삼고 살아오신 시아버지가 주부 선언을 한 건, 3년 전 겨울이었다. 찬바람 불면 살얼음 동동 뜬 식혜부터 찾으시더니, 엿기름 구하러 방앗간 다녀오시던 시어머니가 그예 빙판에 넘어져 허리를 다치는 대형 산재가 터진 것이다. 자리에서 한 번 일어나려면 장미란이 역기 들 듯 우지끈 하시니, 밥은커녕 물 한 잔도 옳게 얻어먹기 어려워진 시아버지 중대결단을 내리셨다. "내 밥은 내가 해결한다!"
한데 인생역전이 일어났다. 68세 사위어가는 당신의 DNA에 빛나는 요리 본능이 있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멸치 하나를 볶아도 잣과 호두를 곁들이는 센스며 차돌박이에 애호박 종종 썰어 바글바글 끓여내는 된장찌개, 말라 비틀어진 명태 코다리를 매콤짭쪼롬하게 지져내는 솜씨가 여느 아낙네의 뺨을 치셨으니 시어머니의 무색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듬해 봄에는 식재료도 직접 장만하겠다며 손바닥만 한 뒷마당에 텃밭을 일구셨다. 상추나 키우시겠지 했던 것이 배추·고추·무까지 소출이 확장되고, 급기야 김치 한번 담가보련다 선포하시니 "니 애비 좀 말려달라"는 시어머니의 급전이 날아든 것이었다.
시어머니 아니고 시아버지였다. 며느리에게 직접, 그것도 직장으로 전화를 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시아버지를 알현하는 일이 1년에 서너 번이나 될까. 마주친다 한들 "왔냐" "됐다" "가라" 단 세 마디뿐이던 당신이었다. 게다가 두 일도 세 일도 아니고, 열 일 제치고 내려오란다. 연말이라 할 일이 태산인데도, 그 준엄하고도 단호한 영(令)에 "바쁜데요" 소리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다 도로 기어들어갔다. 대신 남편을 몰아친다. "내가 쓰러진 소도 일으킨다는 인삼낙지라도 먹는 줄 아시는 거야? 애 둘 키우며 직장 다니느라 몸이 아작날 판인데, 김장, 그것도 60포기가 웬 말이냐고오~."
#
해병대 출신에 도청 공직자로 은퇴한 것을 당신 인생의 빛나는 훈장으로 삼고 살아오신 시아버지가 주부 선언을 한 건, 3년 전 겨울이었다. 찬바람 불면 살얼음 동동 뜬 식혜부터 찾으시더니, 엿기름 구하러 방앗간 다녀오시던 시어머니가 그예 빙판에 넘어져 허리를 다치는 대형 산재가 터진 것이다. 자리에서 한 번 일어나려면 장미란이 역기 들 듯 우지끈 하시니, 밥은커녕 물 한 잔도 옳게 얻어먹기 어려워진 시아버지 중대결단을 내리셨다. "내 밥은 내가 해결한다!"
한데 인생역전이 일어났다. 68세 사위어가는 당신의 DNA에 빛나는 요리 본능이 있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멸치 하나를 볶아도 잣과 호두를 곁들이는 센스며 차돌박이에 애호박 종종 썰어 바글바글 끓여내는 된장찌개, 말라 비틀어진 명태 코다리를 매콤짭쪼롬하게 지져내는 솜씨가 여느 아낙네의 뺨을 치셨으니 시어머니의 무색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듬해 봄에는 식재료도 직접 장만하겠다며 손바닥만 한 뒷마당에 텃밭을 일구셨다. 상추나 키우시겠지 했던 것이 배추·고추·무까지 소출이 확장되고, 급기야 김치 한번 담가보련다 선포하시니 "니 애비 좀 말려달라"는 시어머니의 급전이 날아든 것이었다.
#
"김치 맛은 배추를 얼마나 잘 절였느냐가 좌우한다. 잠버릇 고약한 식구들 베갯머리 넣어주듯, 배춧속에 소금물이 고루고루 배도록 밤잠 설치는 손정성이 그대로 맛이 된다. 갈치젓·가자미젓·까나리젓 다 필요 없다. 굴도 사치다. 멸치젓 한 가지면 충분하니. 거기에 무·배·양파·대파 채 썰어 넣고 마늘·생강 곱게 다져서 넣어라. 갓을 넣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찹쌀죽이니라. 귀찮아도 이걸 찰지게 쑤어서 넣어야 김치에 윤기가 나고 감칠맛이 도는 법이다. 이 무 좀 봐라. 사람 속이랑 무 속은 모른다던 니 시어미 말을 김치 담가보니 알겠다. 겉은 야물어 보이는데 잘라보면 바람만 잔뜩 든 것들이 태반이니, 사람도 그렇지 않더냐. ……김치 담그는 일 힘들지. 중노동이지. 그런데 1년에 한 번이면 해볼 만하다. 살림 그거 우습게 봤더니, 아니더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더라. 쌀 한 톨 키워내는 농부의 수고도 귀하지만, 가족 위해 따뜻한 밥상 차려내는 손길은 백배 더욱 귀하더라. 재미도 있었다. 살림을 몰랐으면 인생의 재미를 절반밖에 모르고 갈 뻔했으니 얼마나 억울하냐. 생쌀에 서정(抒情)의 물기를 부어 밥을 짓는 것이 시인이라고 하더니, 내가 요즘 시 쓰듯 밥 짓는 재미로 산다."
#
아들, 며느리, 딸, 사위가 둘러앉아 배추에 양념을 치댄다. 거드는 손이 여럿이니 산처럼 쌓였던 60포기 배추가 반나절 만에 내려앉았다. 자식들이 벌겋게 양념을 뒤집어쓰는 동안 시아버지는 양은솥 가득 돼지목살을 삶으신다. 양파·대파·생강·통마늘에 커피가루를 넣어 팔팔 육수를 끓이신다. 누린내 한 점 없이 꼬들꼬들 삶아진 고기가 희뿌연 김을 내뿜으며 접시에 담긴다. 노랗게 익은 배추에 목살 얹고 양념 얹어 싸먹는 맛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겠다. 얄미운 시누이도, 페미니스트 며느리도 양볼이 미어터져라 먹는다. "눈보라 몰아쳐도 끄떡없다. 지구가 꽁꽁 얼어붙어도 문제없다. 1년 농사 다 지었으니 오늘 죽어도 원이 없다." 시어머니가 아니고 시아버지 말씀이다.
내년부턴 김장하는 날을 가족 모임으로 하겠다는 시아버지의 통보에 영민한 며느리가 오른손을 번쩍 든다. "그럼 명절 중 하나는 건너뛰는 거지요?" 시어머니가 거드신다. "그럽시다. 설날은 각자 떡국 끓여 먹으며 알아서 쇱시다요." 바리바리 김치통을 품에 앉고 자동차에 오른다. 내년 추석에나 만나자며 신이 나서 손을 흔든다.
차창 너머 손자 손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아버지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내리신다. "내년엔 콩도 한번 해볼란다. 메주 한번 쑤어볼란다. 음식 맛은 역시 장맛 아니겠느냐."
"김치 맛은 배추를 얼마나 잘 절였느냐가 좌우한다. 잠버릇 고약한 식구들 베갯머리 넣어주듯, 배춧속에 소금물이 고루고루 배도록 밤잠 설치는 손정성이 그대로 맛이 된다. 갈치젓·가자미젓·까나리젓 다 필요 없다. 굴도 사치다. 멸치젓 한 가지면 충분하니. 거기에 무·배·양파·대파 채 썰어 넣고 마늘·생강 곱게 다져서 넣어라. 갓을 넣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찹쌀죽이니라. 귀찮아도 이걸 찰지게 쑤어서 넣어야 김치에 윤기가 나고 감칠맛이 도는 법이다. 이 무 좀 봐라. 사람 속이랑 무 속은 모른다던 니 시어미 말을 김치 담가보니 알겠다. 겉은 야물어 보이는데 잘라보면 바람만 잔뜩 든 것들이 태반이니, 사람도 그렇지 않더냐. ……김치 담그는 일 힘들지. 중노동이지. 그런데 1년에 한 번이면 해볼 만하다. 살림 그거 우습게 봤더니, 아니더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더라. 쌀 한 톨 키워내는 농부의 수고도 귀하지만, 가족 위해 따뜻한 밥상 차려내는 손길은 백배 더욱 귀하더라. 재미도 있었다. 살림을 몰랐으면 인생의 재미를 절반밖에 모르고 갈 뻔했으니 얼마나 억울하냐. 생쌀에 서정(抒情)의 물기를 부어 밥을 짓는 것이 시인이라고 하더니, 내가 요즘 시 쓰듯 밥 짓는 재미로 산다."
#
아들, 며느리, 딸, 사위가 둘러앉아 배추에 양념을 치댄다. 거드는 손이 여럿이니 산처럼 쌓였던 60포기 배추가 반나절 만에 내려앉았다. 자식들이 벌겋게 양념을 뒤집어쓰는 동안 시아버지는 양은솥 가득 돼지목살을 삶으신다. 양파·대파·생강·통마늘에 커피가루를 넣어 팔팔 육수를 끓이신다. 누린내 한 점 없이 꼬들꼬들 삶아진 고기가 희뿌연 김을 내뿜으며 접시에 담긴다. 노랗게 익은 배추에 목살 얹고 양념 얹어 싸먹는 맛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겠다. 얄미운 시누이도, 페미니스트 며느리도 양볼이 미어터져라 먹는다. "눈보라 몰아쳐도 끄떡없다. 지구가 꽁꽁 얼어붙어도 문제없다. 1년 농사 다 지었으니 오늘 죽어도 원이 없다." 시어머니가 아니고 시아버지 말씀이다.
내년부턴 김장하는 날을 가족 모임으로 하겠다는 시아버지의 통보에 영민한 며느리가 오른손을 번쩍 든다. "그럼 명절 중 하나는 건너뛰는 거지요?" 시어머니가 거드신다. "그럽시다. 설날은 각자 떡국 끓여 먹으며 알아서 쇱시다요." 바리바리 김치통을 품에 앉고 자동차에 오른다. 내년 추석에나 만나자며 신이 나서 손을 흔든다.
차창 너머 손자 손녀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아버지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내리신다. "내년엔 콩도 한번 해볼란다. 메주 한번 쑤어볼란다. 음식 맛은 역시 장맛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