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들이 김치를 담갔다

평범한 가장이었던 이치윤(58)씨는 7년 전 파킨슨병에 걸린 후부터 삶이 엉클어졌다. 오른쪽 팔과 다리는 굳었고, 말도 더듬거렸다. 직업인 택시기사는 그만뒀고, 부인과도 이혼했다. 하나뿐인 아들은 일곱 살 때 죽었다. 장애 1급 판정을 받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된 이씨는 지금 월세 25만원짜리 단칸방에서 40만원의 생활비로 산다. 이씨는 "혼자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 넘어질 때면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살던 이씨는 최근 부쩍 밝아졌다. 성민복지관 내 봉사동아리 '꿈꾸는 거북이'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지난해 7월 중장년층 장애인 12명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자신보다 삶이 더 힘든 이에게 차를 대접하기 등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꿈꾸는 거북이란, 거북이처럼 행동은 굼뜨지만, 우리에게도 꿈이 있다는 뜻이다. 이씨는 "내가 가진 조그만 것이라도 나누며 살다 보니 삶에 애착이 생기고 보람도 느낀다. 산다는 것이 설렌다"고 말했다.

27일 오후 2시 서울 노원구 성민복지관 1층에 '꿈꾸는 거북이' 회원 10명이 김장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모였다. 한 회원이 "최근 배추값 상승으로 김치를 못 먹는 사람이 많다"며 "우리가 재배한 무, 배추로 김장해 독거 노인, 중증장애인 등에게 나눠주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올해 봄부터 회원들은 서울시와 복지관 도움으로 의정부에 위치한 35평 규모의 텃밭을 주말 농장으로 사용했다. 회원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농장으로 가 평균 세 시간씩 일했다.

이들은 바닥에 푸른색 천막용 천을 깐 후 큰 대야에 소금에 절인 배추를 넣어 양념을 버무렸다. 회원 대부분이 몸 한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한 손으로 배춧속을 채워 넣었다. 옆 사람과 함께 배추 하나를 버무리기도 했다. 2시간 동안 70포기의 김치를 담그고 20개 박스에 나눠 담았다. 이렇게 만든 김치는 오후 4시부터 노원구 일대 독거 노인 등 어려운 가정에 전달됐다. 김치를 받은 유용규(56)씨는 "치매 걸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 이번 겨울 김치는 어떻게 갖다 먹나 걱정했다. 매우 맛있고 고맙다"고 말했다. 회원 윤차근(65·뇌병변 2급)씨는 "나도 평생 남이 주는 김치만 먹었다. 처음으로 김치를 담가 남에게 주니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복지관 관계자는 "나이 어린 장애인들은 부모도 돌봐주고 사회 시스템도 잘 돼 있지만, 중·장년층처럼 나이 들어 장애인이 되고 나면 자립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면서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보다 남을 돕는 기회를 찾는 것이 장애인들에게는 진정한 자립의 출발점이며 이런 삶의 기반을 닦아주고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