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배우·제주방언으로 만든 영화 들고 세계로

제주에서 나고 자란 오멸(42) 감독은 줄곧 '제주 영화'만 만들어왔다. 제주를 배경으로 제주 출신 배우들이 출연해 제주 방언으로 연기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엔 언제나 표준어 자막이 달려있다. 제주를 다룬 그의 최근작 '지슬'이 내년 1월 17일 개막하는 선댄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다. 선댄스는 명배우 겸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가 만든 세계 최고 권위의 독립영화제다.

오 감독은 이미 '지슬'로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과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CGV 무비꼴라주상, 시민평론가상을 받았다. 24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오 감독을 만났다.

'지슬'은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공포적 분위기를 피해 서귀포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동굴로 숨어들었던 마을 주민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오 감독은 "'지슬'은 '지실(地實)'의 제주도 방언으로, '땅의 열매' 즉 감자를 말한다"며 "감자는 전 세계의 소울 푸드이고 이 영화에서 생존과 희망을 상징한다"고 했다. "4·3사건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무겁고 불편해 일부러 외면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제 뿌리이고, 내가 딛고 있는 땅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번에 정면 돌파를 하려고 했죠." 4·3사건 자체는 일부 세력에 의해 이념적으로 윤색돼 다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영화 '지슬'은 그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순수 드라마의 성격이 강하다.

'지슬'은 요즘 보기 드문 흑백 작품이다. 마을 사람들이 동굴에 숨어 있는 장면은 대부분 실제 큰넓궤 동굴에서 찍었다. 제작비는 2억5000만원. 제주영상위 등에서 일부 지원받고 오 감독이 빚도 냈다. 제주대 미술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흑백이라고 해서 무채색만 보이는 게 아니고 보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감각을 만날 수 있다"며 "가끔씩 색(色)도 시끄럽단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동굴에선 고생 좀 했죠. 사람 하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동굴 통로에 스탭들이 길게 누워 카메라 등 장비를 옮겨야 했어요. 겨울이라 동상 걸린 사람들까지 나오고…."

오 감독은 대학 다닐 때부터 공연에 관심이 많아 2004년 '자파리연구소'라는 문화예술창작집단을 만들었다. '섬 이야기' '오돌또기' 등 제주 향토 문화를 담은 창작 연극으로 이목을 끌었고, 일본 벳푸와 후쿠오카, 호주 등에서 공연했다. 각각 500만원, 800만원을 들여 찍은 그의 전작(前作) 영화 '뽕똘' '어이그 그 귓것'에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 대부분도 '자파리연구소' 출신이다. '자파리'란 제주 방언으로 '쓸데없는 놀이, 장난'을 뜻한다.

오 감독은 "나에겐 영화가, 인생이 다 자파리다. 삶을 가볍게 보는 것 같지만 고통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힘이 된다"고 했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완성 못 하거나 개봉을 못 할 수도 있단 생각을 해요. 그렇게 되면 영화를 찍는 과정은 쓸데없는 짓이 될 텐데,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의미 없는 건 아니거든요. 전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싶어요."

이번 영화에서도 군인 역할 몇 명을 빼면 출연 배우 모두 제주 출신이다. 당연히 표준어 자막도 있다. "제주 사람이라고 제주 영화만 찍어서 되겠느냐"고 묻자 오멸 감독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한다. "저한테 서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세계의 중심은 제주거든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세계를 다루는 것만큼 영화에서 중요한 게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