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파워 클래식] 사회주의 파탄 후, 진화론에서 재발견한 인간과 세상

'유전자'라는 말이 넘쳐난다. 비만유전자, 우울유전자, 불임유전자, 자살유전자, 폭력유전자, 심지어 잘생긴 사람을 수식할 때는 우월유전자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 바야흐로 유전자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에게 유전자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스스럼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1976년에 출간된 '이기적 유전자'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생명'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그 답을 찾기 위한 첫 시도로 대학에서 생물을 이루고 있는 세포와 그 속에 있는 미세 기계들의 동작, 그리고 화학물질을 매개로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을 배웠다. 하지만, 그런 지식들이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끄러웠던 사회 속의 나, 인간까지 설명을 해주지는 못했다. 부족함을 채워보려고 역사와 철학 공부를 시작했던 무렵에 막 번역된 '이기적 유전자'를 만났다.

이 책은 다시 나를 과학의 언저리에 머물도록 했다. '인간'과 '생명'에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다윈 이전의 대답은 역사적 의미 이외에는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낫다는 도발적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 도발도 매력적이었지만, 원자에서부터 인간까지 더 나아가 인간들의 행동과 그들이 얽힌 사회까지 꿰뚫어보려는 포부에 사로잡혔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감히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일관된 설명을 하지 못할 때, '이기적 유전자'가 포함된 사회생물학 진영은 드물게 일관되고 아름다운 설명을 제공하려고 애를 썼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합리적이고 일관된 설명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과학과 철학의 시조로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를 꼽는데, 그는 '만물이 물이다'고 했다. 그를 과학의 시조로 삼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만물이 물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신'의 개입과 같은 것이 없이 자연적인 원인만으로 세상을 설명해 보려는 탈레스의 자세 때문이다. 거대 담론과 이론을 세워보려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시도들이 줄줄이 파탄이 났을 때도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설명을 인간과 사회까지 넓혀보려는 시도가 주목을 받았다.

원자들이 모여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들 중에서 스스로를 복제하는 물질(복제자)이 만들어진다. 복제자(유전자)는 그것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내고 그 그릇의 모양과 성질을 결정한다. 그릇은 자연 선택이라는 방법을 통해 진화한다. 인간과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 그리고 문화까지도 자연 선택의 과정이자 결과이다. 인간은 불멸의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기계에 불과하다. 이기적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하려는 과정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생명 현상, 문화 현상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종교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인간의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진화했다. 그 결과로 신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믿는다.

이런 '이기적 유전자'의 설명에서 사람에 따라 막히는 부분이 다를 것이다. 무생물에서 생명이 탄생했다는 전제부터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생명의 탄생을 자연적인 원인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에서 더 나갈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비록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된 이후에 사람은 진화의 법칙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여기서 걸린다. 사회와 문화로까지 설명하는 데 껄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부는 사회생물학의 설명이 아직까지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나뉘어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이기적 유전자'는 출간 당시에 새로운 과학적 내용을 밝히거나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까지의 진화론의 발전을 잘 정리하고 도발적인 비유를 통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생명의 존재와 역사를 다루는 가장 유력한 과학 이론인 현대 진화론을 시작하는 입문서로 '이기적 유전자'만 한 것이 없다. 어떤 방향에서든 인간과 인간의 행동에 대한 공부를 한다면 이 책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직도 나는 인간과 생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듯이 자신들의 '의지'로 유전자의 조종에 역행하는 인간들과 그들이 도달한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매끄럽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이것이 이 분야의 깊은 연구에 의해서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향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야 해소되는 문제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심할 지점은 독단론에 빠지지 말 것. 지식의 근본적인 오류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전혀 다른 전제에서 쌓은 지식이나 믿음에 대해서는 좀 더 넓은 아량이 필요하다.

140자 트윗독후감

"문과에 경영대생 입니다. 처음에는 과학적 지식이 전무한 터라 정말 힘들게 읽었습니다. 3장 정도 지나가면서 그나마 수월하게 읽었네요. 인간이나 동물이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한 생존 기계라고 한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커가면서 과학을 기피했는데 이책을 읽어 다행입니다."(페이스북 응모자 Hwa Ra 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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