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 다른 나] '각설이'로 힘든 사람들 위로하는 기아차 광주공장 남궁철주(51)씨

거울을 보니 여러 겹 기운 옷에 울상을 짓고 있는 표정, 쭈뼛쭈뼛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이 영락없는 각설이 모습으로 보인다. 각설이로 무대에 나선 지 벌써 23년째, 이제 각설이는 연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인생이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울고 웃었던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이 들어 외로운 독거노인,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장애인, 그리고 부모 없이 살아가는 보육원생…. 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대신 울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슬픔과 고된 삶을 나의 구성진 소리로 훨훨 날려버리고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승화해 주고 싶었다.

나는 기아자동차 광주(光州)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1985년 입사했으니 벌써 28년째다. 주조부에서 엔진 소재가 만들어지면 정밀하게 다듬는 마무리 작업을 맡고 있다. 세계무대에서 뛰는 기아차의 일원으로 일한다는 것이 뿌듯하다.

공장에서 일하는 내가 각설이 타령을 시작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마음이 맞는 사우들과 전남 함평의 한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1986년, 원생들을 위한 특별공연을 준비하다가 '내가 뭘 해볼까' 고민하였다. 그때 문득 어린 시절 보았던 각설이 타령이 떠올랐다. 옛 기억을 더듬어 그대로 해보았더니 아이들이 뜨겁게 호응하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들의 박수에 힘입어 연습 또 연습을 거쳐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각설이 타령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분장, 누더기 옷, 더벅머리 가발 등 모든 준비를 내가 직접 했다. 수없이 공연을 하다 보니 이제는 내 이름 넉자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요즘에는 각설이판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여러 행사에 참여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전문 각설이가 아니고 회사에 다니는 입장이라 오라는 곳을 모두 찾아가기는 어렵다.

나는 일주일씩 주·야간을 번갈아 일한다. 그 빈틈을 활용해서 한 주에 세 번가량 공연을 한다. 칠순잔치나 동창회, 각종 모임에 사회자 겸 각설이로 나간다. 그리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떡이나 통닭 등을 마련해서 양로원이나 불우시설을 찾아간다. 몸은 비록 힘들어도 공연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하면 피곤함은 저절로 사라진다. '오늘은 또 어떤 이들이 나와 함께 웃고 울어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진다.

각설이 타령은 누구나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다. 소재나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이야기든 풀어낼 수 있다. 유머로 시작하지만 판이 끝나갈 때쯤에는 함께 웃고 울어 하나가 된다.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이웃에 사랑을 베풀고, 더불어 살자'는 내용이 주가 되지만 이를 갖가지 이야기와 구성진 대사로 풀어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틈나는 대로 대상과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각본을 쓴다. 그리고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2년 7월 조선족 동포들 앞에서 했던 공연이다. TV를 보는데 불법체류를 피하려고 조선족들이 서울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을 찾아갔다. 여름철 한낮에 땀을 흘리며 줄 서 있던 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주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주나' 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전라도 광주에서 왔는데, 여러분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들을 돕는 목사를 만나 공연 주선을 부탁했다. 구로구민회관에 조선족 동포 600여명이 모였다. 공연을 하면서 "희망을 갖고 힘내어 살자"고 말했다. 공연이 끝나고 그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렀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또 다른 잊지 못할 공연도 있다. 2004년, 광주에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돕고 있는 교회를 찾아가 공연 기회를 달라고 했다. 피부는 달랐지만 품바 장단에 흥겨워하며 각설이 동작을 따라 하는 모습에 나 또한 즐거워졌다. 2010년엔 중국 지린성에도 갔다. 국내 민속공연팀이 함께 공연하자고 연락해왔다. 동포들은 "품바 공연은 처음"이라며 흥겨워했다. 그때 동포들과 함께했던 감동은 지금도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다.

가족은 나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다. 아내는 각본을 쓰는 데 필요한 소재나 이야기를 수시로 건네주고, 두 아들도 나를 응원해준다. 나는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거쳤고 고교는 직장을 다니며 야간과정으로 마쳤다. 그동안 힘겹게 살아왔지만 지금 나는 몹시 바쁘다. 그리고 그래서 행복하다.

나는 2010년 '품바의 고향' 전남 무안에서 열린 품바페스티벌 왕중왕전에서 장원을 했다. 앞으로도 나는 영원한 품바일 것이다. 꿈이 있다면 품바 공연을 언어는 달라도 모든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세계적인 공연으로 키워보고 싶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응원단장을 하고 청년 시절부터 회사 야유회의 사회는 도맡았던 '끼'가 바탕이 된 것일까.

자! 오늘도 나는 품바로 어려운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련다. "얼쑤! 각설이가 나가신다. 오늘도 신명나게 나랑 한번 놀아볼랑가?"

취재·정리=권경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