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되려고 '마일리지 쌓기 여행' 가는 심리 읽어라

약 10년 전 12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무척이나 추웠던 휴일 새벽에 뉴어크(Newark)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당시 미국에서 근무 중이던 필자는 미국 시장 개척을 위해 각 지역의 주요 거래처들을 만나러 다녔고, 한 달에도 몇 번씩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하지만 그날은 출장이 아니었다. 비행기로 2시간 반을 날아가서 도착한 곳은 폭설이 내리고 있던 미니애폴리스 공항이었다. 혼자 공항터미널에만 머무르다 다시 뉴어크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이 그냥 비행기만 타러 다니느라 일요일의 달콤한 휴식을 다 날리고 개인 돈 400달러를 썼다.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가 오후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필자를 가족들이 애틋한 모습으로 지켜봤다. 왜 그랬을까.

◇우수 고객 되려고 일없이 비행기 타

미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다 보니 일 년 내내 비행기를 타야 하는 영업·마케팅 직원이 많다. 서부에서 동부로 여행할 때는 밤샘 비행편의 비좁은 일반석 자리에서 새우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항공사에 따라 다르지만 최우수 고객이 되면 고충을 많이 덜 수 있다. 일반석을 타도 전용 카운터를 이용해 지루한 줄서기를 피할 수 있고, 테러 경계로 보안 검색대에 많은 사람이 대기할 때도 패스트트랙(fast track)을 통해 손쉽게 통과할 수 있다. 탑승을 먼저 할 수 있어 짐을 얹을 선반도 쉽게 찾는다. 예약이나 일정 변경 때도 우선권이 있다. 무엇보다 같은 일반석이라도 좀 더 편한 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고, 차상급(次上級) 좌석이 비면 무료로 업그레이드도 받는다. 우수 고객의 신분은 한 달에도 몇 번씩 출장을 다녀야 하는 사람들에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다. 특히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는 돈으로 살 수 없는 VIP 대우이다. 미국 항공사들은 이런 혜택을 주는 우수 고객의 자격을 연간 탑승 실적을 기준으로 매년 결정한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시 필자가 연말을 앞두고 계산해 보니 그 항공사의 우수 고객이 되는 데 2000마일이 모자랐다. 다음해에도 자주 출장을 다녀야 하고, 절반은 밤을 새워 비행기를 타야 할 텐데 우수 고객 선정 기준에 근접한 마당에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심 끝에 1000마일 정도 떨어진 목적지를 물색하고, 그중에 항공료가 가장 쌌던 미니애폴리스로의 왕복 여행에 시간과 돈을 쓴 것이다. 용무가 없는데도 단순히 일정 수준의 마일리지를 달성함으로써 다음해에 해당 항공사의 우수 고객이 되려고 비행기를 타는 이런 여행을 '마일리지 런(mileage run)'이라고 부른다.

'인 디 에어(Up in the air)'라는 영화에는 한 항공사의 평생 우수 고객이 인생 목표인 조지 클루니가 항공사의 7번째 '1000만마일 여행자'가 되어 기내에서 기장의 축하를 받고 감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항공 여행이 일상화된 미국에서는 우수 고객이 되기 위한 노력이 눈물겹다.

◇"단골 고객 5% 늘면 이익 25% 증가"

고객의 로열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이런 제도는 비단 항공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 호텔 체인이 우수 고객에게 주는 혜택에 만족한 필자의 지인(知人)은 최소 숙박 횟수를 맞추지 못하게 되자 연말 휴가지를 그 체인의 호텔이 여럿 있는 지역으로 선정하고 매일 아침 짐을 싸서 그 체인의 호텔들로 옮겨 다니며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떠난 가족들의 원성이 컸지만, 그는 새해에도 우수 고객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항공, 호텔, 레스토랑, 소매업의 경우 단골 고객이 5% 증가하면 이익이 25% 증가한다고 한다. 좋은 조건만 찾아다니는 뜨내기손님에 비해 단골 고객은 다른 회사의 가격이나 서비스가 웬만큼 차이 나지 않고서는 쉽게 옮겨 가지 않기 때문에 고객의 충성도가 회사의 수익으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항공이나 호텔업계의 경우 출장 여행 고객이 휴가 여행 고객보다 가격에 덜 민감하고 자주 이용하게 되므로 출장 고객들을 단골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수익의 원천이다. 한번 우수 고객이 돼 로열티 프로그램을 누린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다른 브랜드로 갈아타기 어렵다. 웬만한 문제가 있어도 전환비용(그동안 쌓아둔 우수 고객의 신분을 포기하고 다른 브랜드로 옮겨 처음부터 우수 고객 요건을 채워나가는 데 드는 비용)이 높아 다른 브랜드는 고려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기 마련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혜택이 고객 충성도 높여

우수 고객 제도 같은 로열티(loyalty) 프로그램은 이제 우리 생활 전반에 들어와 있다. 인터넷에서 책을 사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도 마일리지가 적립되는 '마일리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일리지 제도는 재구매 시 가격 할인, 리베이트(상품 대금 중 일부 환불해 주는 돈) 지급 정도에 그쳐 고객의 충성도를 한껏 끌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로열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이라면, 단지 우수 고객이 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호텔에 투숙하는 고객의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그들은 여행 갈 일이 없는데도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일까? 그들이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추가 마일리지가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기는 신분(우수 고객 등급)의 변화와 혜택이다. 우수 고객이라는 신분이 주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를 얻고자 한다. 로열티 프로그램이 잘 갖춰지면 서비스나 제품이 설령 다소 미흡하더라도 고객의 충성도를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번 관계를 맺은 고객들과 평생 관계를 가짐으로써 '고객 생애 가치(customer lifetime value)'를 극대화할 수 있다. 로열티 프로그램을 마일리지 보너스의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없는 혜택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고객의 충성도가 진정 담보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