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공원 남쪽 둥그렇게 에워싼 가파르진 않아도 들쭉날쭉한 길… 아침햇살 반짝이는 새하얀 結晶들 셔터 소리에 꽁지 빼는 박새들 만나 덕유산 같은 눈꽃 황홀경은 없어도 겨울 산 기운 속 한껏 행복해질 것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겨울 산길이 눈부시게 하얗다. 눈이 두툼하게 쌓여 나무 계단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발 디딜 때마다 아이젠이 눈 다지는 뽀드득 소리가 상쾌하다. 박새는 짹짹 찌르, 멧새는 삐이 삐이 뱃종 뱃종, 겨울 텃새들 지저귐에도 귀가 즐겁다.
코끝 맵도록 차고 달콤하도록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오르락내리락 산허리를 가는 숲 속 눈길 7㎞를 지난 주말 걸었다. 집에서 차로 20분쯤 나간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눈 세상을 누렸다.
지난주 금요일까지 내리 사흘 눈이 왔다. 중부에 눈 그친 토요일, 날이 개면서 서울 기온이 영하 12도까지 떨어졌다. 이런 날 산에 가면 황홀한 눈꽃과 상고대를 만날 공산이 크다. 그러나 겨울 산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걸맞은 체력과 장비가 받쳐줘야 한다.
일기예보를 유심히 살피다 함백산 눈꽃 산행 가는 여행사 상품을 샀다. 강원도 태백 함백산은 고도 1572m에 이르지만 정선 만항재에서 출발하면 높이로 쳐서 230m만 오르면 된다. 천천히 걸어도 세 시간이면 오갈 수 있다. 겨울 등산에 자신 없는 사람도 감당할 만하다. 만항재까지는 여행사 버스가 데려다주니까 눈길 운전 걱정도 없다.
금요일 오후 여행사에서 취소 통보가 왔다. 강원도에 눈이 많이 와서 버스가 만항재까지 올라가기 힘들 것 같다고 한다. 신발과 바짓단에 눈·바람 막아주는 스패치까지 장만했는데…. 그러다 서울대공원 산림욕장을 떠올렸다.
동물원 남쪽을 둥그렇게 에워싼 과천 청계산 중턱 5부 능선쯤에 빙 둘러 소로를 냈다. 그리 가파르진 않아도 들쭉날쭉 언덕과 골 따라 아기자기한 길을 오르내리자면 금세 땀이 솟는다.
동물원 입장료 3000원을 내고 정문 들어서서 오른쪽 산기슭에서 산림욕장이 시작된다. 날이 추운 데다 아침 9시 문 연 직후여서 사람이 없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나직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결정(結晶)들이 유리가루 뿌려놓은 것 같다.
눈 위로 고개 내민 마른 풀잎들과 눈을 맞춘다. 하얀 눈 두르고서 비탈에 선 겨울 나무들도 사진에 담는다. 해찰하며 걷자니 사람들이 하나 둘 앞질러 간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산림욕장 곳곳엔 약수터와 정자, 탁자를 놓아 쉬어 가게 했다. 양지 바른 정자에서 싸 온 커피를 마시는데 귀여운 박새들이 주변을 맴돈다. 정자 마루 한쪽에 누군가 겨울 새들 먹으라고 과자 부스러기를 놓아두고 갔다.
새들이 과자를 주워 먹고 싶어도 사람이 앉아 있어서 쭈뼛거린다. 자리를 비켜주고 긴 줌 렌즈 끼워 겨누고 있었더니 냉큼 달려든다. 셔터 소리가 요란했던지 한 톨 물자마자 꽁지 빠지게 달아난다. 그래도 한 마리씩 차례로 공습하듯 내려앉아 별식(別食)을 챙겨 간다.
제주도 말로 놀멍 쉬멍 느긋하게 걸어 주차장으로 돌아오기까지 네 시간 걸렸다. 몸은 노곤하고 머리는 개운한 게 함백산이라고 이만 할까. 과천 산림욕장은 연둣빛 신록 내미는 봄, 녹음 짙은 여름, 울긋불긋 가을, 눈 덮인 겨울까지 사철 버릴 게 없다. 지하철 대공원역이 있어 오기 쉽고, 길이 험하지 않아 걷기 좋고, 잘 관리해 언제나 열려 있다.
아쉬움은 딱 하나, 눈꽃이 시원찮았다. 간밤에 바람이 드셌던 탓인지 가지에 눈이 거의 얹혀 있지 않았다. 상고대는 응달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도 파랗게 열렸으면 설경(雪景)이 더 돋보였을 텐데. 새삼스럽게 무주 덕유산 눈꽃이 참 아름답구나 싶었다.
덕유산 향적봉은 1614m로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지만 네댓 살 아이부터 여든 노인까지 누구에게나 겨울 비경(��景)을 허락한다. 산 아래 덕유산리조트에서 1520m 설천봉까지 곤돌라가 다니는 덕분이다. 설천봉 스키 슬로프 출발점까지 곤돌라로 15분 걸린다. 설천봉에서 향적봉까지 600m 계단 길은 20분이면 걸어 오른다.
향적봉에서 중봉 가는 2㎞ 능선 숲길은 눈꽃 터널, 설화(雪花) 천국이다. 눈꽃과 상고대가 11월 중순부터 늦게는 4월까지 수시로 핀다. 눈꽃은 바람에 날린 눈이 나뭇가지에 꽃처럼 달라붙은 것이다. 상고대는 공중 습기가 추운 날씨를 만나 나무에 얼어붙은 나무 서리, 수상(樹霜)이다. 눈꽃 가득 매단 가지들이 춤추는 것 같다. 새떼가 가득 올라앉은 것 같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에 어린 상고대는 신령스럽다.
그렇듯 눈꽃 황홀경을 산악인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평창 발왕산 눈꽃도 용평리조트 곤돌라로 편하게 올라가 볼 수 있다. 덕유산처럼 별다른 겨울 장비 없이 옷만 잘 껴입으면 된다. 운동화를 신어도 좋지만 아이젠은 꼭 차야 한다. 아이젠이 없으면 엉금엉금 기다시피 걷느라 설경 즐길 겨를도 없다. 앞뒤 사람에게 방해만 된다.
무주나 용평·정선까지 찾아가기 어렵다면 눈 그치고 맑게 갠 날 아침 일찍 서울대공원 산림욕장에 나가보자. 아이 손잡고 가족끼리 걸어보자. 눈꽃과 상고대는 못 만난다 해도 정신 번쩍 드는 겨울 산 기운에 행복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