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윤덕의 사람人] 시골살이 25년 판화가 이철수

새해 달력 한 장 얻을 요량으로 10년 만에 들른 판화가 이철수(58)의 집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낡은 농가에 조립식 건물로 이어붙였던 작업실은 번듯한 별채가 되었고, 뜨락엔 대나무가 자랐다. 마당은 두 배로 넓어졌다.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시면서 그 집 자식들이 떠안기듯 집터를 팔았다고 했다.

"내일모레 환갑"이라며 헤벌쭉 웃는 이철수의 등 뒤로 2013년 달력이 보였다. 간결한 칼자국, 촌철(寸鐵) 그러나 시정(詩情)이 넘치는 문장, 담백한 수묵이 처마밑 고드름처럼 쨍하게 가슴을 찔렀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낮고 느렸지만, 간혹 세상을 향한 일침이 가감 없이 흘러나왔다. 지난봄 펴낸 '이철수의 웃는 마음'(이다미디어)에 적었듯, '잘 들지 않는 칼 한 자루 들고 진시황의 부대와 싸우는 심정으로' 이철수는 살고 있었다.

그의 무기는 농사와 판화였고, 그의 적(敵)은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시장과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군부독재에 항거해온 민중미술의 대표선수였던 그가 1987년 제천으로 내려갈 때 사람들은 투사의 삶에 진절머리가 난 모양이라고 했다.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믿었다. 오해였다. "마음공부 삼아" 1000평의 논을 우렁이 농법으로 짓고, 1000평의 밭을 유기농법으로 짓고 사는 그는, 세상의 온갖 허명(虛名)과 싸우는 '투사'이자 판화로 시(詩)를 쓰는 농부였다.

◇농사를 권함

―가난한 농부의 집이 아닙니다.

"돈으로 따지면 서울 아파트 전셋돈만도 못할 텐데, 빈 마당에 나무 몇 그루 심어놓으니 마음의 여유로 보이나 봐요."

―제천 온 지 만 25년입니다. 첫해엔 고생 좀 하셨지요?

"데모를 위한 걸개그림 그렸을 때라 이사도 정보과 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했어요. 여길 찾아온 첫 손님도 형사였고. 덕분에 적응은 쉬웠어요. 위험한 사람이다, 싶은지 동네 분들이 구박은 안 하더라고요(웃음)."

―이제 진짜 농부가 된 느낌이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나이가 드니 체력이 달려서 농사를 조금씩 줄이고 있어요. 진짜 농꾼이면 힘들다고 줄이겠어요?"

―마당에 정원이 있고, 담장도 새로 쌓았네요.

"의도된 연출이기도 해요. 귀농한 사람들 궁상떨며 퍼질러 사는 게 싫었어요. 왜 농사짓는 사람은 일 끝내고 나면 손 씻고 책을 볼 수 없느냐, 말이죠. 난 논에 갔다 오면 머리부터 털고 몸을 씻은 다음 앉아서 책을 읽어요. 농사짓는 일이 꽤 품위 있는 일이란 걸 도회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체 게바라는 전쟁하면서도 책을 봤다지 않아요? 돈과 교양의 문제가 아니에요. 고만고만 소박하게 사는 시골 사람이라도 여름 되면 화단에 꽃 피우고 툇마루에 먼지 하나 없이 사는 분이 있고, 막 사는 사람이 있지요."

―농사지은 것 8할을 이웃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면서요. 팔면 용돈 될 텐데.

"딱 한 번 우리 식구(아내)가 깨인가, 콩을 팔러 나간 적이 있는데, 수매가를 보고는 '아, 내가 겨우 이 돈 받으려고 그 고생을 했나' 싶더래요. 그냥 주고 '고맙다' 소리 듣는 게 낫지."

―그럼 생업을 유지하는 수단은 여전히 판화입니까?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니 그걸 돈의 가치로 따지면 적지 않지요. 그림은 주로 겨울에 그려요. 다른 계절엔 농사짓느라 바쁘니 겨울에 밑그림을 모두 그려놔야 해요."

―올해 귀농 인구가 2만 가구를 돌파할 거라고 합니다. 농사를 적극 권해온 보람이 있겠어요.

"귀농해야 할 이유 정말 많지요. 도시가 사람 살 수 없는 곳이 된 지 오래예요. 꼭 축사(畜舍)를 보는 것 같아요. 깨끗해 보이고 뭐든지 잘 관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눈엔 항생제 많이 쓰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요. 위생, 위생 하며 유난을 떨지만 본질적으로는 닭 사육하는 것처럼 보인다고요. 질병과 다툼이 생기는 거 당연하지요. 안 싸울 수가 없어요. 총기 사용을 허가한다면 매일 총질이 난무할 걸요?"

―흙길보다 아스팔트가, 단독주택보다 아파트가 편리한 걸 어떡합니까.

"편리하면 좋은 건가요? 도시에서 더 나은 삶이란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 더 많이 돈을 버는 것, 한 방향밖에 없지요. 엊그제 김장 배추 마지막 포기들을 들여놨어요. 속고갱이가 차기엔 너무 추운 날씨인데도 배추 떡잎이 그걸 포기하지 않고 끝내 감싸 안고 견디는 걸 보았지요. 이런 것 보는 재미로 시골서 살아요. 눈만 뜨면 그런 지혜들이 나를 경책(警策)하지요. 그게 다 내 그림이 되고."

―귀농이 어려운 건 자녀들 교육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도 학교 있는 걸요? 시골서만 자란 우리 딸이 자기는 가난해도 재미있게 살 자신은 있다고 해서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요. 친척들이 문제집을 보내도 나는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대신 책만 봐라' 하면서 서점에 외상장부 만들어줬어요. 이왕이면 자식의 재능이 공부에 있으면 좋겠다는 게 부모 마음이지만 어차피 자기가 깨달아 헤쳐가야 할 인생인데."

―귀농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허영과 환상을 가지고 오니까 그래요. 서울서 누리던 걸 그대로 누리려고 하니 실패해요. 정통 농사가 아니라 1차, 2차 가공농업으로 돈을 벌려다 엎어지기도 하고. 귀농운동본부의 책임도 있어요.

거기서 귀농자 강연회를 여는데 도법, 윤구병, 전우익 같은 분들을 모셔와요. 전우익 선생은 군것질 농사만 하는 분이에요. 윤구병 선생은 나처럼 밥걱정 없이 농사짓는 가짜 농꾼이죠. 이철수나 윤구병을 성공적인 귀농 사례로 소개하는 건 나쁜 짓이에요."

―농사가 웬만큼 만만한 일이어야지요.

"원불교 교전인 '대종경'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돼지가 야위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먹이를 잘 안 먹어 보리를 주다가 입맛이 돌아왔길래 다시 겨를 주었더니 쳐다보지도 않더래요. 눈 한번 높아지면 못 낮추고, 살림살이 늘릴 순 있어도 줄일 순 없는 게 도시의 삶이지요. 집착이 크면 야윈 돼지처럼 되고요. 도망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시에서 살아냈으면 농촌에서도 살 수 있어요."

◇뒷산 무덤처럼

"저물도록 일했습니다. 이제 들어가자고 아내와 남편이 서로 부릅니다. 밥은 달고 잠은 깊을 겁니다." -하늘 이고 저물도록 (2011년작)

―12월입니다. 이철수의 판화 달력을 사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세상과 이야기하려고 그림을 그려요. 달력도 그래서 만들었고. 달력 만든 지 벌써 20년이 넘었나 봐요."

―죽비처럼 정신 번쩍 뜨이게 하는 글귀들 때문 아닐까요?

"글쎄요. 일본 사람들이 내 달력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달력에 일본어와 영어도 표기한대요. 일본에서 작품 전시하자고도 하는데 내가 어디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비행기 타면 담배를 피울 수 없으니 고역이고."

―'땀 없이 먹고 사는 삶은 빌어먹는 것만도 못하다'라고 쓰셨지요?

"수행 없이 먹고 노는 중들 보라고 쓴 글입니다."

―스님들이 노발대발하지 않습니까.

"그 그림을 스님이 사갔어요(웃음)."

―시골에 묻혀 사니 잊힌다는 생각은 안 합니까. 외롭지 않은가요?

"한 번도요. 외로움과 같이 못 가면 예술 못 하지요. 뒷산 무덤처럼 여기 있겠다고 생각한 지 오래예요. 기일 되면 오는 사람 있는 것처럼 보게 될 사람은 다 오고요. 혼자 있을 시간이 없어서 문제 아닌가요? SNS가 대세라고 하던데, 저런 걸 하다 보면 책 한권 정독할 틈이 있을까 싶어요. 정작 해야 할 일은 못 하지 않나.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니 여기 와 이렇게 안 살았으면 큰일 날 뻔했지요."

―'이철수의 웃는 마음'에 가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료(畵料)가 입금된다는 소식이 와서 네 식구가 읍내 목욕탕으로 나섰는데 통장에 돈이 들어오지 않아 목욕은 관두고 짜장면 두 그릇 시켜 넷이서 나눠 먹었다는.

"그 시절엔 다 어려웠으니 상처로 남아 있다거나 하진 않아요. 후배들 놀러 오면 우리 식구가 워낙 잘 퍼주는 사람이라 차비도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덥석 쥐여주는데 이튿날 자기가 서울 갈 차비가 없는 거지요. 그래 읍내로 나가 아는 형님댁, 그마저도 형이 외출하고 없어 그 집 파출부한테 돈을 꾼 적이 있어요(웃음)."

―가난이 반드시 행복을 훼방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 거지요?

"좋은 사람과 같이 살면 행복이죠. (돈이) 있으면서 싸움만 하는 사람이 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누리는 사람들 있고요. 적빈(赤貧)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가난을 함께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고 사랑하게도 돼요. 좋은 일은 함께하고 나쁜 일은 안 하는 건 볼썽사납지 않나요? 젊은 사람들이 뭘 다 갖춰놓고 시작하려는데 안타까워요. 고전적인 주례사에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랑하며 살라'는 말 있잖아요. 참 단순해서 흘려듣기 쉽지만 정말 중요한 얘기죠."

―판화에 아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철수가 퍽 소심하고 보수적인 남자구나, 생각했습니다.

"가정은 내 삶의 진지예요. 여기에 평화가 없고, 여기서 재충전 못 하면 바깥에서 어떻게 견딥니까. 바깥은 전쟁터인데. 난 뜬구름 잡는 거 안 좋아해요. 마음공부도 가정에서, 사회에서 더 잘 지내자고 하는 거고. 새가 높이 나는 이유도 먹이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김수현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머리를 톡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남편이 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식처럼 품고 살아야 한다'는.

"우리 부부라고 해서 늘 좋기만 한가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유사한 감정들이 왔다갔다하지요. 그럴 땐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 잎사귀가 툭툭 떨어져 나갈 만큼 부는구나' 하지요. 살아보니 다 지나가지 않던가요? 마음공부 별것 없지요. 내 안에 나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눈을 만들면 돼요."

◇아, 권정생…

정체를 알 수 없는 벨이 두 번 울렸다. 이철수의 아내 이여경이 작업실 남편에게 '밥 먹으러 오라'는 신호였다. 입식으로 개조한 주방에 시골 밥상이 차려졌다. 말린 뽕잎과 버섯 넣어 지은 밥을 청국장에 비빈 다음, 간장고추절임을 얹어 먹는 맛이 꿀맛이다. 여수가 고향인 아내는 빈민운동을 하다 이철수를 만나 결혼했다. 농사는 그녀가 주도한다고 했다. 민중미술의 꽃이었던 남편이 돌연 시골로 가자고 했을 때에도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젊어서 참 고운 얼굴이었겠다"고 하자 이철수가 빙그레 웃는다. "고왔지요. 하지만 손은 벌써 농사꾼 된 지 오래예요. 거칠고 새까매지고."

―왜 박달재로 내려왔습니까.

"80년대 후반에 독일에 갔어요. 내가 좋아하는 케테 콜비츠(프롤레타리아 판화의 선구자) 전시관에도 갔는데, 텅텅 빈 전시장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잊혔구나, 세상이 변했구나 실감했지요."

―그 이유뿐인가요?

"그때 만난 독일 화가가 '너의 그림에서는 전체주의 냄새가 난다'고 하더군요. 완강히 저항했지요. 내가 군부독재와 싸우는 사람인데 전체주의라니요.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아 1년 반 동안 그걸 붙잡고 고민했어요."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실망이 컸다는 얘기는 뭡니까.

"누가 날 미워했거나 내게 죄를 저지른 건 아니에요. 내가 손가락질했던 세상에서 나를 본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디나 계산이 있고 욕심이 있었지요. 거기다 독일에서 안고 온 고민이 겹쳤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크레인 고공 농성장에 자신이 그린 화염병 투사 그림이 내걸린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독일에서 막 돌아왔을 때인데 TV에서 그걸 보니 불에다 기름 붓는 격이 됐지요. 물론 그 시절을 부정하진 않아요. 절박했지요. 다만 지금 똑같은 주제로 주문을 받는다면 달리 그렸을 거란 뜻입니다."

―귀촌에 불교도 영향을 미쳤나요?

"영성의 세계에 대해서는 20대 초반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시위 그림 그리면서 의식적으로 초월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려고 한 건데, 10년도 못 돼 벽에 부딪히고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죠. 시골 내려와 첫 전시에 권정생 선생이 글을 써주셨어요. 철수 안에 저렇게 예쁜 것이 들어 있었는데, 그동안 거친 것들만 그려서 힘들었겠다. 큰 위안이 되었지요."

―박달재로 온 뒤 그림의 세계가 달라졌습니다. 어떤 이는 선화(禪畵)라고도 하고요.

"성찰하는 힘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어요.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삶이 없지요. 이념적 지향이 좌냐, 우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사회가 전면적으로 자기 성찰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 끝없이 성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나마 내겐 좋은 선생님들 계셔서 쓰레기통 같은 삶이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을 말합니까.

"권 선생뿐 아니라, 무명 화가 시절 종이 값 대주시면서 '갚기는 다른 데다 갚으라'시던 이현주 목사님, '제일체심(除一切心), 마음을 다 버리라'시던 장일순 선생 같은 분들이지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줄 잘 서라, 도리 없다, 좋은 사람들 옆에 사는 수밖에 없다, 하지요(웃음)."

―평생 교회 종지기로 살면서 주옥같은 동화를 남긴 권정생을 많은 이가 존경합니다만, 그분의 극단적인 청빈, 세상과의 단절된 삶은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숲에 들어가면 잘생긴 나무만 있나요. 이해할 수 없이 생긴 나무도 있지요. 권 선생은 세상의 평가를 극도로 혐오했어요. 자신이 천착하는 세계에서 스스로 일궈낸 세계가 좋은 것이면 바깥 평판 이전에 자기 안에 먼저 넘치는 기쁨이 있잖아요. 그것이 가장 진실하고 소중하고요. 이미 자족한데 거기에 뭘 더 얹는다는 것은 똥 위에 오줌을 얹는 일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셨죠. 모든 상(賞)을 거절한 것도, TV에서 당신 책 소개하는 걸 극구 반대하며 화내신 것도 그래서였고요."

―새 자동차를 타고 일직(안동) 권 선생 댁에 찾아갔더니 '철수 차가 바뀌었네' 해서 무안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종교인들이 호의호식하는 걸 못 보셨지, 가난한 화가가 돈 좀 벌었다고 자랑하는 건 봐주셨어요(웃음). 몸 안 좋으실 땐 누구도 오는 걸 귀찮아하셔서 일직에 갔다가 댁으로 통닭만 배달시키고 온 적이 있지요. 밤에 전화가 걸려와요. '닭 잘 먹었다.' '저희가 보낸 줄 어찌 아세요?' 했더니 통닭집 주인이 '못생기고 조그마한 남자랑 예쁜 여자가 왔더래서 너인 줄 알았다' 하십니다. 나보다 더 뒷산 무덤처럼 사셨던 분이지요."

◇나눔이 고통인가?

―아버지가 무역업 하다 파산한 바람에 궁핍한 성장기를 보냈더군요.

"집에서 몸만 빠져나와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죠. 내가 살아온 삶이 평균보다 더 험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내가 아프게 겪은 일, 힘겹게 산 일, 어느 것 하나를 빼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요. IMF 이후로 아버지를 미워하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내 얘길 들려주고 싶었어요. 실패한 아버지들 많은데 그들이 저 미움을 왜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하나 싶고."

―요절한 판화가 오윤의 영향을 받았지요?

"그분 말년에 가깝게 지냈어요. 판화 하면서 선 굵고 남성적인 힘이 넘치는 형의 작품을 각별히 여겼는데, 내 첫 개인전(1981년)에 기별도 없이 와줘서 감복했지요. 예술로 성찰할 줄 아는 분이었어요. 한번은 그래요. '집에서 상다리 고칠 때는 아무 계산 없이 상다리 예쁘게 고치는 데만 열중하는데, 그림을 그릴 때는 세상의 판단과 평가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고. 오윤 형이 살아 있었다면 진경을 보여주었을 텐데."

―민중화가 홍성담이 그려 논란이 된 박근혜 출산 그림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화가로서 좋게 보진 않아요. 정치적 도발을 위해 그린 그림 맞지요. 한편으로 그냥 모른 척해도 되지 않았나, 싶어요. 포르노가 범람하는 시대에 예술하는 사람이 좀 과한 표현을 한 건데, 그냥 두었으면 이미 떠내려갔을 일을 왜 자꾸 작대기 가지고 건져 올리나 싶지요."

―가깝게 지내던 도종환 시인이 정계로 갔습니다.

"사망 아니면 중상이라고 했어요. 말렸는데 가더군요. 바른 사람이니 잘하겠지요."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말씀 있습니까.

"우리가 부르는 정치는 사람들이 모여 더러운 짓을 공모한다는 뜻이지요. 정치가 그렇게까지 오염된 언어로 호칭되는 사회를 너무 오래 살았어요. 무서운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번 선거 끝나면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그림을 그려볼까 해요. 누가 되든 개혁을 하겠다고 하니 '진짜 사람'들이 나서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지금은 목욕탕 하수구 보는 것 같잖아요?"

―'나눔'에 대한 얘기도 자주 하셨죠.

"고등학교 때였나. 학교 파하고 친구랑 둘이 집에 와서 점심 먹을 거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밥을 두 그릇 차려놓으시겠대요. 그런데 친구 한 명이 더 우리 집에 가겠다고 따라나섭니다. 밥이 두 그릇밖에 없다는 생각에 안 된다고 했지요. 며칠 뒤 두 그릇을 셋이서 나눠 먹어도 되었다는 생각이 뼈아프게 왔어요. 친구에게 사과했지요. 요즘 드는 생각이, 열몇살 때 '나눠 먹으면 된다'는 걸 깨치고도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왜 그런 지혜로부터 멀어지는가 하는 거예요. 그 지혜를 사회화해서는 안 되는가. 나눔을 특별한 일로 여기고, 그걸 잘하는 사람 칭찬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나눔 아닌가요? 나눔이 그렇게 고통스러운가요?"

―하루하루가 에누리없이 존재의 절정이어야 한다고 했지요.

"죽음을 좀 더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덜 사나워지고, 덜 욕심내고, 쓸데없는 짓 덜하지 않을까. 밖의 평판 상관없이 지킬 수 있는 자기 긍정이 있어야 대나무가 대나무로 크듯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다가 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동네 노인한테 '우리 아들 잘생겼죠?' 했더니 '사람은 다 똑같아!'라는 대답에 한방 크게 맞았다면서요.

"지혜는 우리 곁에 무수히 많지요. 개가 짖어도 법문이라고 하듯이. 높은 지식은 없지만 몸으로 살며 체득한 달관과 초연을 농부들에게서 배워요. 자연의 법도를 몸으로 아는 사람들이지요."

―이제 평동리 토박이 대접을 받겠습니다.

"어느 동네 어르신한테 '여기서 태어나셨지요?' 하고 여쭈었더니 펄쩍 뛰시면서 '내가 여기 전쟁 끝나고 왔잖아' 하십디다. 우리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