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에 한글 배워 詩集… 만학도들의 교재됐다

진효임(71)씨는 지난 8월 시집 '치자꽃향기'를 냈다. 나이 일흔에 동네 복지관에서 한글을 배우면서 쓴 3년치 일기를 묶었다. 고된 시집살이, 소값 파동으로 빈털터리가 돼 막노동을 한 남편과 6남매를 키운 사연, 늦깎이 공부의 어려움 등을 담았다. 99세에 시집을 낸 일본의 시바다 도요(101) 할머니를 보면서 용기를 얻은 진씨는 이제 할머니 시인 지망생과 한글을 뒤늦게 공부하기 시작한 만학도, 다문화 여성들에게 '작은 희망'이 됐다.

최근 진씨의 시집은 문화관광부 우수문학도서(시집 13종)에 선정됐다. 문정희·진은영 등 쟁쟁한 시인들의 시집과 함께였다. 문광부는 진씨의 시집 2000권을 구입해 전국의 작은 도서관, 복지관, 지역 아동센터 등에 보낼 예정이다.

"안녕하세요, 진효임 작가입니다. 이런 자리가 부끄럽지만 한글 배우던 제 생각이 나서 왔습니다."

진씨는 지난 20일 오후 9시 서울 중랑구에 있는 태청야학을 찾았다. 13.2㎡(4평)짜리 야학 교실엔 한글을 배우는 늦깎이 50~70대 학생 20여명이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던 진씨는 입술이 말라 몇 번이나 물을 들이켰다. "전쟁 때문에 학교를 못 다녔고, 일찍 시집와 글을 배울 새가 없었지요. 애들 학교에 보낼 서류 쓰는 일이 제일 고역이었어요. 6남매 다 키워놓고 손녀까지 봐주고 나니 공부에 욕심이 생겼어요. 나이 들어 하려니 입술이 터지고 코도 헐었어요. 다 늙어 뭐 하는 짓이냐고 욕하는 친구도 있었고요."

학생들은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2년째 한글을 배우는 최예순(58)씨는 "나도 못 배운 것 부끄러워 남들한테 말 못하고, 다 늙어 배워 뭐 하냐는 말도 들었던 터라 눈물이 핑 돌더라"고 말했다. 한글반 구본권(73)씨는 "나도 전쟁통에 공부를 못 하다가 이제 한글을 읽고 쓰게 됐다"며 "이런 나도 시를 쓸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강연을 마친 진씨는 자기 시를 낭독했다. '치매 들어 자식들 짐 될까 무서워/어려운 컴퓨터 배우기로 마음먹었네/자판 글자들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고/배우고 돌아서면서 잊어버리기를 수백 번/…가방 끈 짧다고 우세 마소/나 이제 컴퓨터로 이메일도 보내고/시도 쓸 줄 안다네 -컴퓨터 할머니.'

지난 9월 본지 기사가 나간 뒤 진씨와 진씨의 시집은 '바쁜 몸'이 됐다. 평생교육 시설인 제주 동려학교에서 최근 진씨의 시집을 100권 구입했다. 만학도나 다문화 여성들이 다니는 한글반 교재로 쓰기 위해서다. 동려학교 김준명 교사는 "시인과 학생들의 나이대나 살아온 여정이 비슷하다 보니 남편이나 친정 부모에 관한 시에 공감하시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천안에 있는 충남평생교육원도 "뒤늦게 한글 배우는 학생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한글 백일장을 열어 학생 70여명에게 진씨의 시집을 나눠 줬다.

할머니 시인들의 시집 출간도 잇따른다. 지난달 할머니 시인 23명이 시집 '날 보고 시를 쓰라고'를 냈다. 평균 79.2세인 시인들은 충북 옥천군 안내면의 '행복한 학교'에서 10개월 동안 한글을 배웠다.

'행복한 어머니학교 졸업식/평생 못 배운 한에 증말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갖고 싶던 졸업장/나이 74세 소원 풀었네요 -고마워유, 이홍여' '오늘 다섯 마리 팔았다/칠백칠십만원에/어이가 없어 펑펑 울고 싶은 맘/…잊자 잊자/말없이 떠나가는 금소/바라보며 한없이 서글픈 내 마음 -금소, 윤옥분'.

시집 발간을 도운 황예순 시인은 "자신들이 살아온 얘기를 하시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시였다"고 말했다.

출판사를 하는 진씨의 딸 박채정(42)씨는 이달부터 '만학도 시집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만학도가 쓴 시를 모아 책을 내는 것이다. 박씨는 "엄마 시에는 어려운 단어가 하나도 없지만 연륜이 담겨 감동을 준다. 전쟁이나 다른 형제를 위해 공부를 포기했던 부모 세대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