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옥이 스크린에 안녕을 고했다. 원색의 치파오를 차려입고 홍콩 뒷골목을 거닐던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니. 우리는 아직 그녀를 보낼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은데 말이다. 놀란 마음에 충동적으로 써내려간 여배우 장만옥에 대한 단상.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 시인 박정대의 ‘장만옥’
한 번쯤 그녀를 흠모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 시 ‘장만옥’의 구절처럼, 어느 날 잠에서 깨어 오래도록 그녀를 생각한 청춘의 한순간이 우리에게는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장만옥은 무림을 호령하던 임청하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도시의 암흑가를 질주하던 오천련으로 양분된 중국 여배우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빛깔을 뿜어낸 이다. 무협도 누아르도 아닌, 말하자면 함부로 하나의 장르에 편입시킬 수 없는 어떤 아우라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싱그러운 웃음 저편에 왠지 모를 허무가, 화려한 치장과 차림 속에 그윽한 애수가 묻어나는 여인. 그녀가 바로 장만옥이다.
화려하고 강렬한, 그러나…
1983년 ‘미스 홍콩’이란 타이틀로 대중 앞에 처음 등장한 장만옥은 바로 그 이듬해 코미디 영화 <청와왕자>에 출연하며 정식으로 배우가 된다. 그리고 지금껏 자그마치 8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평균 잡아 한 해에 2~3편의 영화를 찍은 셈이다. 유년 시절을 영국에서 보냈고, 10대 후반 우연히 친척을 방문하러 홍콩에 들른 것이 계기가 되어 그저 그렇게 연예계에 발을 들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그녀는 처음부터 꽤나 야무지게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할 만하다. 정식으로 연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탓에 한동안 연기 생활이 삐걱거리기도 했지만 그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장만옥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미 홍콩과 대만의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1992년에는 <완령옥>으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석권한다. 그리고 2004년에는 <클린>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배우임을 증명하기에 이른다. 대표작을 슬쩍 꼽아보니 <폴리스스토리>, <열혈남아>, <아비정전>, <신용문객잔>, <동사서독>, <첨밀밀>, <화양연화>, <영웅>, <2046> 등 모두 주옥 같은 작품들이다. 드라마·멜로·액션·코미디·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진 필모그래피가 연기의 스펙트럼을 짐작케 한다.
이 가운데 그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역시 <첨밀밀>이다. 진가신 감독의 <첨밀밀>에서 그녀가 맡은 ‘이요’는 마치 장만옥 그 자체인 듯 보였다. 성공의 야심을 품고 고향을 떠나 홍콩에 당도한 이요는 사랑도 외면한 채 오랜 세월을 외롭게 떠돈다. 그러나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으면 자연히 퇴색되리라 믿었던 사랑은 되려 깊어만 가고, 결국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요와 그의 오랜 연인은 우연인 듯, 혹은 운명인 듯 거리에서 재회한다. 그 순간 이요의 처연한 얼굴 위로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이 흘렀던가. ‘당신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었죠. 저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네요’라는 순정한 노랫말을, 사랑에 대한 지독한 이끌림을 장만옥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정점을 찍는다. ‘꽃 같은 시절의 아름다움’이란 제목 뜻 그대로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인생의 가장 어여쁜 한때, 즉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때 그녀 나이 서른일곱.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무르익어가는 배우’라는 최고의 수식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많은 대중이 <완령옥>이나 <클린>이 아닌 <화양연화>의 장만옥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배우자의 불륜으로 상처받은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이 맡은 ‘리첸’은 그녀의 그 어떤 페르소나보다 화려하고 강렬했다. 매 장면마다 꽃으로 수놓인 원색의 치파오가 그녀의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몸매를 감쌌다. 영화를 보지 않은 이라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 우아한 몸짓이란…. 그러나 그 화려함 위에 덧칠된 창백한 얼굴, 물기를 머금은 눈빛, 태연을 가장한 위태로운 걸음걸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화면 속 장만옥은 더 이상 조명 앞에 빛나는 여배우 장만옥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 앞에 떨고 있는 가련한 여인일 뿐.
유독 멜로 영화에서 그녀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결혼과 약혼이 실패로 끝났고 여러 번의 사랑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던 그녀의 개인사를 떠올린다면 너무 잔인한가.
‘화양연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여배우로 영원할 줄 알았던 장만옥이 작품을 고르는 데 주춤한 모습을 보인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여러 외신이 물어다준 소식은 안타까움만 더할 따름이었다. “나는 이미 아주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다. 흥미로운 역할을 찾기가 갈수록 어렵다.” 정말일까. 그리고 지난해 11월에는 돌연 가수 데뷔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장만옥이 말이다.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음반사와 활동 계약을 맺었으며 밴드까지 결성했다고 한다. 분명 축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단, 그녀의 가수행은 배우생활을 완전히 접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 이미 그녀의 ‘은퇴’는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변신을 반갑게 맞을 팬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미 몇몇 무대에서 자작곡을 열창하며 뛰어난 가창력을 입증했다는 점 또한 서글픈 뉴스에 지나지 않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녀의 은퇴 선언이 단지 싱거운 해프닝이기를. 여배우의 애교 섞인 변덕이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이제 50대로 접어들었고, 그럼에도 아니 그러므로 더욱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녀의 화양연화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카메라 앞이든, 무대 위든 그녀는 우리에게 여전히 여배우 장만옥이다. 그 시절 우리가 흠모했던 여인,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여인. 그녀가 맡아 열연할 다음 역할을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