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잘하는 것이 단지 기술이라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당신은 틀렸다. 19년 차 아나운서 이성민에 따르면 말을 잘하기 위해선 테크닉을 익히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최근 출간한 화법 책에도 그는 썼다. ‘화려한 언변도, 논리로 무장한 언어도 아니다. 서툴더라도 감정에 호소할 수 있는 전달력을 가진 이가 진짜다’라고.
얼마 전 KBS 아나운서 이성민은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7가지 설득력>과 <대통령의 설득법>이라는 두 권의 화법 책을 잇따라 펴냈다. 이들은 분명 다른 성격의 책이지만, ‘리더’와 ‘말’이라는 공통된 화두를 던진다. 두 권의 책에는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경제․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들과 대처나 처칠 같은 역사 속 지도자들의 설득법이 담겨 있다. 각각의 리더가 대중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치밀히 탐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나운서는 왜 리더의 화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는 어쩌면 어리석은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 그는 다름 아닌 말을 업으로 삼은 아나운서가 아닌가. 그리고 더하자면, 그는 다양한 훈련을 통해 오랜 시간 스스로 말 잘하는 방법을 터득해온 이다.
이성민 아나운서는 1995년 KBS 21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해 현재 KBS 아나운서실 차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동안 ‘6시 내고향’, ‘역사저널’, ‘여성공감’ 등을 진행했고, 대선 후보 토론회나 대통령 취임식 같은 역사적 현장에서 중계방송을 한 바 있다. 지금은 KBS 제1라디오의 시사 프로그램 ‘라디오24시’를 진행하며 백석예술대학 겸임교수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윌리엄 포그너의 미국주의>,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7가지 설득력>, <대통령의 설득법> 등의 책을 펴냈다.
본질을 담는 그릇
이성민 아나운서를 최근 가장 흥분시킨 이는 단연 오바마인 것 같다. 얼마 전 재선에 성공하며 다시금 새로운 역사를 써낸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로부터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거 2주 전만 해도 된다, 안 된다 말들이 많았죠. 하지만 결국 극적으로 재선에 성공했어요. 선거 전 세 번의 TV 토론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롬니에게 꼼짝없이 당한 오바마가 말이죠.” 그에 따르면 토론은 상대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토론을 지켜보는 대중을 내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토론 내내 롬니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는 오바마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과정에서 오바마는 자신의 편을 더욱 굳건히 다졌음은 물론이고 상대의 반란표까지 끌어올 수 있었다. “능수능란한 케네디가 엉성한 닉슨을 이기는 시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승리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토론에서 중요한 건 상대와 나를 이분할 수 있는 논점을 가져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는 누차 강조한다. 말을 잘하기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 마음이라는 사실. “입은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비어져 나오는 틈이에요.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 고스란히 말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실언·실수 같은 건 애초에 없다고 봅니다. 모두가 평소 그의 마음이고 정신이에요.” 더불어 그는 링컨의 말을 인용했다. ‘많은 사람을 한 동안 속일 수는 있어도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말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다. 그런 점에서 결코 그 이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 아나운서는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던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의 일화를 소개한다. 생전에 일본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초고속 신칸센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는 일본 관료들에게 했다는 말. “나라도 좁은데 이렇게 빨리 달려 어디를 가려는 것인가?” 이 아나운서는 덩샤오핑의 이 말은 재치나 순발력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바로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라는 것.
‘나’가 아닌 ‘너’를 위한 말
어떤 상황에서 판세를 바꾼 지도자들을 존경한다는 이성민 아나운서는 여러 인물 가운데 특히 처칠을 높이 산다. “처칠이 위대한 건 유머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머는 자기 자신을 밑바닥까지 떨어뜨려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죠. 여유와 깊이를 지닌 사람, 사고의 굳은살을 지닌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바로 유머예요.”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곧 대화의 주도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이 아나운서의 설명이다. 이는 그가 가장 탐내는 능력이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주목받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아나운서를 꿈꿨다는 이 아나운서는 꿈을 이루고 한동안 아나운서 특유의 정돈된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아나운서 생활 13년 차에 접어들던 무렵 ‘여성공감’이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았다고. “주부들이 주로 시청하는 프로그램이에요. 말만 잘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시선을 끌려면 재미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매번 ‘다섯 번만 웃기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웃음).” 그는 유머에 있어서도 노력파다. 노력하면 남을 웃길 수 있다는 것. “야구를 좋아한다고 모두 이승엽이 될 필요는 없죠. 동네야구에서 나만의 플레이를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요? 중요한 건 언젠가 더 넓은 그라운드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 바로 그거죠.”
이 시기 그의 화법도 변화를 맞는다. 과거 ‘나’ 중심의 말하기는 차츰 ‘너’ 중심이 되어갔다. “너 오늘 예쁘다.” “너 오늘은 안색이 안 좋네.” ‘너’에 대한 이야기는 보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음은 물론이다. “생각해보면 말을 잘하는 법은 분명해요. 정답은 상대를 위한, 상대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는 겁니다. 칭찬을 원하는 이에게는 칭찬을, 위로를 원하는 이에게는 위로를.” 쉬운 예로 식당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싸고 푸짐하게’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그 식당은 완벽에 가까워질 것이다. 바로 손님이 원하는 한마디 말이다. “오늘 들어온 생선이 정말 좋습니다” 또는 “생선은 오늘 별로니까 드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와 같은 말. 어렵다고? 그렇지 않다. 상대가 원하는 말은 곧 내가 원하는 말과 같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잊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건…”
그 다음은? 상대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한 다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꺼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수’라 하겠다. 물론 무턱대고 내 얘기를 해서는 곤란하다. 여기서 이성민 아나운서는 한 가지 전략을 귀띔한다.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가가라’는 게 그것이다. 가령 한 청년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는 “언제 만날까?”보다는 “나는 2시나 4시가 좋은데, 넌 언제가 좋아?”라고 물어야 마땅하다. 이는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거절의 확률을 낮추기 위해 발휘한 나름의 기지라 할 수 있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작가 지망생이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듯이 우리도 말 잘하는 이들의 화법을 공부할 필요가 있죠. 그들의 표정이나 동작을 익히는 겁니다.” 이는 이 아나운서가 오랫동안 해온 ‘말공부’ 방법이기도 하다. 욕심 많은 그는 앞으로도 말에 대한 훈련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새해에는 그 훈련을 점검하듯 리더십이나 화법에 대한 책을 추가로 집필하고, 그와 관련한 강연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기회가 된다면 재미있는 토크 프로그램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고도 전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로 평생을 보냅니다. 누구나 말로써 자신을 세일즈해야 하죠. 그러니 말 잘하는 법은 반드시 알아야 해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그 모든 시작은 어디까지나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요.”
이성민 아나운서가 꼽은 말 잘하는 리더
윈스턴 처칠 55년을 정치인으로 군림한 처칠은 정적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노회한 정치인의 거리감이 아니라 친근감이었다. 그는 대중을 설득하는 대신 재미와 감동을 주려 했다. 감동받은 대중이 스스로를 설득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넘어져 국민들이 즐겁게 웃을 수 있다면 저는 다시 한 번 강단에서 넘어지겠습니다.”
다나카 가쿠에이 다나카는 일본 현대 정치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등학교 과정만 마친 총리다. 그것만으로도 그에 대한 조롱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들은 지난 1000년의 역사 속 지도자 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다나카를 꼽는다. 그는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줄 알았다. “내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러나 나는 일에 대해서는 약간의 요령을 알고 있다. 뭐든지 말하라. 책임은 내가 진다.”
마거릿 대처 대처의 위기는 집권 초기에 찾아왔다. 경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20%에 달했다. 실업자 수는 대공황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고 도산하는 기업도 늘어갔다. 영국 전체는 대처를 비난하고 나섰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그녀는 1980년 브라이튼 보수당 회의에서 ‘여러분은 돌아가십시오. 이 여자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며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위기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써 기회를 모색한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한 8년은 마치 ‘강하고 풍족한 미국’이라는 제목의 미국 자부심 부흥 프로젝트 영화 같았다. 그는 미국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국민들이 감동받을 만한 시점에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모두 정당하고 영웅적인 꿈을 가집시다. 제가 말하는 영웅은 바로 여러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