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별천지] 만남과 이별 교차하던 그 작은 驛들을 기억하세요?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철길, 버려진 역사(驛舍)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동 경춘선 화랑대역(등록문화재 제300호).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驛)'이라 불렸으나 2년 전 폐역(廢驛)돼 덩그러니 역사만 남았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긴 춘천행 여정을 시작하는 곳이었죠.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추억을 만들었던 화랑대역이 2010년 12월 20일 문을 닫았습니다. 폐역 2주년을 맞아 이곳을 추억하고 아끼는 여러분과 함께 소주 한잔 하고 싶었어요."

화랑대역의 '마지막 역장(驛長)'이었던 권재희(58)씨의 말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혹한의 추위를 무릅쓰고 모여든 철도 동호회 '엔레일' 회원 20여명은 철길 위를 걷고, 해 질 녘 역사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담소를 나눴다.

얼마 전 회원 수 1만명을 돌파한 '엔레일(Nrail)'은 기차역과 열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고속철(KTX)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는 간이역을 지키고 철도문화를 확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동호회 운영자 임병국(40·NHN 근무)씨는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간이역은 빠르고 매끈한 것에만 익숙한 삶에서 쉼터 역할을 한다"고 했다. "어릴 때 시골집에선 새벽마다 산 너머에서 기차 소리가 들렸어요. 둥둥둥둥…. 그 소리를 들으면 묘한 그리움이 생기곤 했죠.

내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간이역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공간일 뿐 아니라 오랫동안 마음이 머무를 수도 있는 곳이죠.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을 찾아 떠날 수 있잖아요."

2001년 임씨가 '열차사랑'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든 게 시작이었다. 회원 수가 1000명까지 늘어나자 2007년 네이버 카페로 공간을 옮기고 이름도 '엔레일'로 바꿨다. 회원들은 초등학생부터 50대까지 폭넓게 걸쳐 있고, 직업도 회사원·군인·교사·한의사·현직 기관사 등 다양하다.

이들 중 열성회원 500여명의 공통점은 철도 직원들도 알까 싶은 기차역·차량·시설에 대한 정보를 줄줄 꿰고 있다는 것이다. 1년에 두 번 전국 곳곳의 기차역에서 정기 모임을 갖고 수시로 '번개'나 소모임도 열린다. 혼자서 철도 여행을 다녀온 회원들은 카메라에 담은 풍경과 답사기를 부지런히 게시판에 올린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간이역은 300여 곳이다. 최근 10년간 100여 곳이 헐리며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사라졌다. MT 가는 대학생들이 통기타와 배낭을 메고 셀 수 없이 타고 내리던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역도 2009년 헐렸다.

빨간 벽돌 건물의 청평역을 비롯해 춘천역·평내역, 경북선 보문역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이용객이 적어 기차가 더 이상 서지 않게 된 탓이다. 동호회 부(副)운영자인 정진성(29)씨는 "간이역 하나가 없어지면 간이역이 품고 있는 마을의 상징성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영동선 하고사리역과 문경선 불정역은 폐역 후 역사 철거가 결정됐다가 엔레일 회원들의 노력으로 등록문화재로 바뀌었다.

엔레일 회원들 상당수는 이제는 없어진 철길들도 꿰고 있다. 협궤열차가 다니던 수인선, 평야를 달리며 천안까지 이어졌던 안성선 등 1980~90년대에 이미 사라진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올라와 있다.

동호회 게시판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올리는 철도 소식이 빼곡하다. '오늘의 주요 철도 뉴스'나 '주말 특별열차 운행정보'를 매일 올리는 열성 회원도 있다. 정동진을 기차로만 200번 넘게 다녀왔다는 기차여행가 박준규(36)씨는 "회원들이 최근 다녀온 기차역 사진이 꾸준히 올라오기 때문에 내가 직접 가지 않아도 동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냥 쓰고 버리는 기차 승차권 하나도 이들에겐 귀중한 애장품이 된다. '통표'라고 하는 기관차 운전 허가증, 신호용 깃발, 열차시각표…. 운영자 임씨는 "최근에는 철도에 관심 있는 10대가 많이 가입하는 추세라서 온라인 철도 교육에 집중하고 있다"며 "'철도 사진을 찍을 때는 안전선 뒤에서 촬영할 것' '간이역에 가면 역무원의 허락을 받을 것' 같은 기초 정보부터 철도 관련 직업을 갖기 위해 필요한 공부방법이나 이력서 쓰는 법도 알려주고 있다"고 했다.

임씨는 지난여름 카페 공동개설자 2명과 함께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시공사)이란 책을 펴냈다. "일본은 우리보다 철도 문화가 훨씬 더 발달했는데 우리는 이제 겨우 시동을 건 수준이죠. 삶 속에 철도가 들어와 있는 일본처럼 우리도 독자적인 철도 문화를 계속 만들어가야죠. 우리 동호회가 우리나라 철도 문화 발전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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