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주의 세시봉과 인생 얘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1페이지가 28칸으로 구분된 스프링 노트에 단정한 정자체로 날짜별 기록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만난 사람, 장소, 시간, 주요 대화 내용 등이 빼곡했다. 27일 오전 서울 서초동 광고음악기획사 한빛기획 대표 사무실에 앉아 있던 가수 윤형주(65)는 인터뷰에 앞서 웃으며 "잠깐만 이것 좀 마저 정리하고"라고 했다. "일종의 일기 같은 겁니다. 이 노트 하나에 5년간의 내 일상과 주변 사람들 얘기가 담겨 있어요. 집에 가면 70년대부터 이런저런 메모를 담았던 노트가 수십권이에요. 기록에 대한 강박감이 있거든요."

1960년대 청춘들의 감성적 안식처였던 음악다방 '세시봉'을 동료들과 함께 40여년 만에 되살려내며 사회·문화적 신드롬을 만들어냈던 윤형주가 책을 펴냈다. '나의 노래, 우리들의 이야기'(삼인). 조선일보에 작년 7월 11일부터 올해 1월 7일까지 37회에 걸쳐 연재했던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를 편집해 엮은 뒤, 자신의 음악과 인생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더했다. 그는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을 글로 남겨놓는 습관 때문에 내 곁을 스쳐간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억이 남들보다 오래갈 수밖에 없다"며 "그래서 과거의 사실과 추억을 바탕으로 장기간 신문 연재도 할 수 있었고 이런 책까지 내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메모광(狂)의 저력이었던 셈이다.

"팩트만큼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 있어요. 그래서 주변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는 건조하게 사실 위주로 서술했죠.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부끄러운 그늘을 고스란히 공개한다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이 책은 내가 세상을 떠나도 남을 기록이니 얼마나 부담이 컸겠습니까."

윤형주는 이 책에서 인기 절정의 대학생 가수로 활약하다 대마초 소지죄로 체포돼 투옥된 뒤, 유리 조각을 손에 쥔 채 지독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잠들곤 했던 수형(受刑) 생활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는 "사실상 내 삶은 끝났다는 절망뿐이었다"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삶은 스스로 단정 짓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죠. 저는 이후 끝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요. 지금 제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은퇴를 했는데 저는 늘 이렇게 얘기해요. '인생의 마침표를 함부로 찍지 말고 다시 새로운 걸 찾아보라'고요."

윤형주는 지난 2년여간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세시봉 열풍에 대해 "우리들(세시봉의 음악 동료)의 순수한 공동체 의식에 전 세대가 공감했던 것"이라고 했다. "음악 못지않게 우정이 주는 감동도 컸던 것 같습니다. 세시봉에서 함께 성장한 (조)영남이 형이나, 저, (송)창식이, (김)세환이, (이)장희 등은 노래, 재능, 돈, 모든 것을 함께 나눴거든요. 늘 함께 생활하기도 했고요." 그는 "문화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우리는 일상 대부분을 공유하면서 같이 노래를 불렀으니 감성적 힘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며 "친구끼리도 '더치페이'가 일상화한 요즘 그런 우리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비치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윤형주는 CM송의 대가이기도 하다. 한빛기획에 몸담으면서 1400곡의 CM송을 작곡하고 노래도 많이 불렀다. 그는 "내가 애정을 가질 수 있는 제품이라야만 CM송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도 한빛기획을 운영하며 각종 행사와 공연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그는 2013년 또 하나의 커다란 꿈을 꾸고 있다. '세시봉 뮤지컬' 기획이다. 그는 "세시봉 동료들의 히트곡을 보니 대략 120곡쯤 됐다"며 "공개 오디션을 통해 젊은 가수 혹은 연기자를 선발한 뒤, 과거 우리들의 삶과 노래를 무대 위에 재현해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