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따위 던져버리고 바지 하나 더 샀지, 행복해"

이 남자, 행복 비결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울긋불긋 꽃이 흐드러진 듯한 총천연색 의상을 입고 나왔다. 모자와 바지는 초록, 코트는 오렌지, 구두는 빨강, 전날 생일 선물로 받은 빨간색 안경까지 흡사 팀 버튼 영화의 주인공, 아니 악당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국악 평론가 윤중강(54)씨는 "멋있고 맛있게 살기 위해서 의식주 가운데 우선 주(住)부터 집어던졌다"고 했다.

실제 그의 거주 공간은 10평 남짓한 오피스텔. 하지만 바지만큼은 서른 벌에 이른다. 빨강부터 보라까지 무지개색 완비는 기본이고, 금색과 은색 바지도 즐겨 입는다. 명품 의상은 수선이 곤란해서 사절. 이태원의 양장점에서 4만~5만원이면 그의 바지 컬렉션에는 금세 한 벌이 추가된다. 윤씨는 "초록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크리스마스 테이블보가 예뻐 보여서, 그걸로도 바지를 만들어 입었다"고 했다. 음식은 "아무거나 먹자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고 했다.

40대까지 그의 세 가지 인생 소원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사 학위가 절실했고, 좋은 집에 살고 싶었으며, '몸짱'이 되어서 근사한 노출 사진 한 장 정도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섹시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거든요."

박사 과정에 두 차례 들어갔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어느 날 신문 사회면에는 3년째 다니던 헬스클럽이 부도났다는 소식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때 윤씨는 맘속에 지니던 소원 목록을 모두 버렸다.

"'하우스 푸어(house poor)' 대신 '홈리스(homeless) 부자'로 살기로 했다고 할까요. 학벌 대신 학력으로, 집 대신 여행으로, 체격 대신 내면으로 패러다임을 몽땅 바꿨어요."

홍콩과 싱가포르, 마카오와 필리핀까지 한 해 서너 번씩 아시아 고급 호텔을 순례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는 "가격 대비 서비스부터 직원 친절도 조사까지 책 한 권 쓸 분량의 호텔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가끔은 '왜 그렇게 사냐'는 말도 듣는다. 물론 그 말 뒤엔 "그 나이 먹고도" "철없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국악계에서 으뜸가는 '달변가'이자 '수다쟁이'인 그는 곧바로 "여자는 빨간 치마가 되고 남자는 빨간 바지가 왜 안 되는가. 나는 역발상으로 산다"고 맞받아쳤다.

"어릴 적 풍요로움보다는 가난과 친했고, 고교 2학년 때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봤어요. 서양 음악보다는 국악, 기혼 대신 독신까지 제가 걷는 길은 '마이너리티(minority)'에 가까워요. 지금까지 내가 찍어서 당선된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니까요."

그는 행복의 지름길이 자아도취나 뻔뻔함에 있다는 걸 굳이 감추지 않는다. "가끔 '깔때기' 같다는 말도 들어요. 모든 이야기가 언제나 내 이야기로 수렴한다고. 솔직히 국악 평론에서 지금은 경쟁자가 없다고 생각해요. 하루빨리 경쟁자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뭐든 '척'하는 건 잘 못해요. 실제로 잘난 것 같은데 어떡해요."

그는 지난해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음악극 '부산 아라'를 맡아 연출가로 정식 데뷔했다. 1월 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신년 음악회 연출도 맡았다. 그는 "전국 10개 도시를 배경으로 10개의 이야기를 만들어 음악극으로 올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의 '문어발 확장' 욕심에는 한도 없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40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시력이 나빠졌다. 희귀병이었다. 일본에서 약을 수입해서 처방을 해보았지만, 어머니는 결국 두 눈 모두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그의 행복관은 독특하다. "나는 스스로 행복해지고, 그 행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내가 가진 사랑의 98%는 나 자신을, 나머지 2%는 제 어머니를 위한 것이에요."

☞윤중강

1959년 인천 출생. 고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가야금을 배웠고, 검정고시로 1980년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했다. 대학생 때인 1985년 제1회 객석예술평론상으로 데뷔한 이후, 예술 잡지에 글을 실었다. 평론집만 5권을 묶어냈고, 명인·명창의 전기 등을 합치면 10여 권에 이른다. 정작 관심 분야는 '스토리 텔링'. '뽀뽀뽀'와 '창작동요제'의 방송 작가 생활도 했다. 2001년부터 국악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라디오 프로그램을 11년간 진행했다. 지난해 연출 데뷔했고, 만요(漫謠)컴퍼니 예술감독, 목원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본인은 "영원한 프리랜서"라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