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1.03 10:06

직장처럼 일할 수 있는 농업회사법인 만든 제주 서귀포 김명수 씨(45), 오송미 씨(42)

자신의 소망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내린 어떤 선택의 결과라도 기꺼이 껴안고 갈 수 있다면 실패한 삶이란 없다. 김명수 씨는 정해진 운명의 길을 걷는 대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족과 이웃, 그리고 수많은 소비자와 함께 나아가고 있다. 친환경농업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없는 재투자와 자기 혁신을 통해 자신의 인생보다 훨씬 긴 비전을 만들었으며, 그러한 선택은 저절로 그의 소명의 길이 되었다.

친환경농업에서 가능성을 보다

울산에서 대학을 나온 뒤 대기업에서 일하던 김명수 씨는 건강상의 문제로 고향 제주로 내려와 고등학교에서 전산과목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던 중 EM(Effective Microoganisms; 유용미생물) 친환경농업에 빠져있던 동료교사를 통해 농업에 대한 비전을 그리기 시작했다.

“농업을 하게 되면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고 자신의 시간을 나름대로 자유롭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물론 보람이 있는 일이었지만 솔직히 종종 갇혀 지낸다는 느낌이 들곤 했거든요. 점점 농업의 매력에 빠지다 보니 교육이란 것이 꼭 젊은 학생들뿐 아니라 농사를 지으며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귀농을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친환경농업을 통해서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해내면 환경과 인간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처갓집 또한 제주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있어서 자연스레 작목은 감귤과 한라봉으로 정하고 기본적인 영농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농업에 뛰어든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친환경농업을 한다고 하니 주변의 만류가 더욱 심했다. 당시에는 친환경에 대한 인식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생긴 감귤의 비애

김 씨는 확고한 꿈이 있었기에 자신의 귀농생활이 쉽게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특히 친환경재배는 귀농초기 그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주었다. 제주가 비록 고향이기는 하지만 초보 농사꾼인 그에게 좋은 땅을 고르는 법이나 구체적인 영농노하우를 알려줄 멘토가 없었다. 교육을 통해 배운 대로 해보았지만 생각만큼 결실을 얻기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판로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가 재배한 감귤은 무농약 재배를 고수하다 보니 겉모양이 못생겨서 상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썩혀 버리거나 판매하지 못한 감귤을 보고 있노라면 긍정적인 김 씨의 눈에서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일쑤였다.

“7~8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힘든 시간이 계속 됐어요. 시설에 투자되는 비용에 비해 매출은 형편이 없었고 항상 마이너스였으니까요.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포기하면 대출금은 물론 담보로 잡힌 재산까지 모든 것을 버려야 했기 때문이죠. 상인들이 사주지 않는다면 소비자와 직접 거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못생겼지만 안전한 농산물이라고 홈페이지를 통해 홍보를 했습니다. 점차 친환경농산물에 관심을 가지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우리의 고객을 확보해나갈수 있었습니다.”

김 씨는 재배면적을 넓히기 시작했다. 무농약으로 재배하는 자신의 땅 외에 추가로 감귤밭을 임차해 저농약재배를 함으로써 판매를 늘려 갔다.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농업은 단순한 노동이 아닌 사업이며 경영마인드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친환경농업이라는 자신의 철학도 중요하지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철저한 경영분석과 함께 펼쳐져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얻은 것이다.

소비자에게 통한 농부의 진심

김 씨 부부는 요즘 이른 아침에 감귤밭에 나가 전정작업(가지치기)을 하고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우체국 쇼핑을 통해 주문된 감귤과 한라봉을 택배로 부친다. 일 년 내내 택배물량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중문관광단지에 있는 직판장과 해가 지날수록 늘어나는 거래처(도매상)도 그의 귀농이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단골들이 늘어났다. 이유인즉슨 귀농 12년 차에 이른 그의 영농노하우가 감귤과 한라봉의 맛을 명품의 반열로 끌어올린 것이다. 생선, 감귤, 목초액, 키토산 등에 EM을 적용한 천연액비는 감귤나무에 더없는 보약이나 마찬가지이며, 두 아들과 함께 만들어 걸어 둔 판자는 감귤나무에 쓴 사랑의 편지이자 생명에 대한 교감이었다. 이러한 정성때문인지 맛좋은 감귤과 한라봉을 얻는 것은 당연지사. 한번 맛을 본 소비자들의 입소문에 홈페이지 회원만 5,000명이 넘어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느꼈던 소회 등을 편지로 써서 주문한 농산물과 함께 보내기도 하고, 직접 말린 감귤과자나 초콜릿도 동봉하여 고객들과의 인연을 돈독히 했다.

“아내가 단골 고객들에게 직접 쓴 편지나 자그마한 선물을 동봉하곤 했어요. 우리 감귤과 한라봉을 사주는 소비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또 귀농해서 열심히 사는 이야기를 하고도 싶었나 봐요. 그런데 고객들도 맛있는 귤 잘 먹었다며 선물을 보내오는 것이 아닙니까? 한과도 보내주고 떡도 보내주고 말이죠. 하하.”

한번은 고객이 택배로 종합선물을 보내 준적도 있었다. 20kg 쌀 한 포대와 사과, 쌍화탕, 일할 때 쓰라고 장갑까지 챙겨준 택배상자를 받은 것이다. 온 가족이 모여 택배상자를 열어보고는 친정어머니가 보내준 것 같은 선물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동안의 가슴 아픈 기억이 사라지고 농부의 진심에 대한 그 어느 것보다 큰 선물이었다.

함께 만드는 비전, “태반의 땅 제주”

김 씨는 얼마 전 감귤 쿠키의 시제품을 전북 고창의 가공식품 회사에 의뢰했었다. 마침 도착한 4가지 맛의 감귤쿠키를 아내와 함께 시식하며 주위의 반응이 기다려진다며 잔뜩 설레는 듯했다. 그는 33농가와 함께 ‘태반의 땅 제주’라는 농업회사법인을 만들었는데, 새로운 수익창출을 위해 농산물 가공 사업으로 활로를 모색중인 것이다.

그는 ‘태반의 땅 제주’를 통해 장기적인 비전을 확립한 상태다. 2개월에 걸쳐 작성한 사업계획서로 농가들의 참여를 끌어냈고, 다양한 사업과 꼼꼼한 경영을 통해 농업도 젊은이들이 뛰어들 수 있는 훌륭한 직장이 될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나눔과 공유를 실천하고 백년 지속가능한 농업을 하기 위해 직장처럼 일할 수 있는 농업회사를 만들게 됐습니다. 태반의 땅 제주의 목표는 농장은 다 따로 있지만 직장처럼 일할 수 있는 공동체, 그 속에서 자기 일처럼 일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 할수 있는 법인체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노동력이 없는 농가들의 밭을 위탁관리해줌으로써 서로 윈윈(Win-Win)하는 수익시스템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성공시켜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법인체의 기반 닦기에 열정적이다. 농산물 홍보를 위한 명함, 리플릿 등의 디자인도 직접하고, 국내외인을 대상으로 농가에서 생활하면서 노동과 여행을 할 수 있는 제도인 우프(WWOOF; 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를 도입해 농업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도 끌어낸다는 계획이다. 또한 제주 관광자원과 연계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준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그린투어리즘을 실현하고자 한다.

“농촌에서 인생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떤 강사분이 그러더군요. ‘자기가 살고 싶은 직함을 지어라.’ 그래서 저는 팜라이프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창조하는 삶을 꿈꿉니다. 건전한 노동과 직장으로서의 농업, 그리고 자유로운 여가를 보낼 수 있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삶을 말이죠.”

김 씨 부부는 블로그에 자신들의 영농생활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훗날 귀농인들의 멘토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우리 농촌이 더욱 풍성해지고 젊은 농부들이 늘어나길 원하는 것이다. 김 씨와 같은 팜라이프 디자이너가 늘어나 후배 귀농인들의 농촌정착에 많은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본다.


자료제공·농림수산식품부,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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