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청어 만원어치면 온 식구가 행복해지죠

모두가 없이 살았기에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끔 어머니는 나를 불러 시장에 가자고 했다. 그때마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었지만, 장터에서 팥죽이나 국밥을 먹으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시장 가는 일은 5남4녀 아홉 자식 중 셋째 아들로 어렵사리 뽑힌 내가 누린 행복이었다.

파리 유학 시절, 나는 매주 한 번 장 보러 다녔다. 파리 남쪽 오를리 공항 근처 '헝지스'라는 도매시장, 토요일 아침 6시에는 일반인도 입장 가능했다. 모든 게 거의 반값인데도 싱싱했다. 어쩌다 전복이 나오면 한국의 10분의 1 값으로 5㎏들이 한 상자를 샀다. 회, 스테이크, 내장 젓갈, 장조림까지 해먹었다. 하도 자주 가니 시장 사람들은 나를 요식업자로 알았다. 새로운 식재료가 나오면 나를 붙들고 설명해줬다. 단골 정육점에서는 사골을 공짜로 줬다. 친한 작가들과 함께 그 '노다지' 국물을 우리고 맛난 음식 해 먹으면, 그날 우리 집은 잔칫집이었다. 유학생의 궁상도, 수업과 창작·생계에 대한 압박도 잊었다.

요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시장, 그중에서도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이다. 아침에 생선 사러 가는 것이 성에 안 찰 때는 한밤 1~2시 경매장도 찾는다. 주변에 축하할 사람이 있거나, 내가 스스로 위로받고 싶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생선이 부를 때'다. 제철이다.

여름 민어가 좀 좋은가. 초복(初伏) 전에는 큰 민어가 드물지만 중복(中伏) 지나면 5㎏ 넘는 것들이 매일 200마리 이상 쏟아진다. 1000여 마리씩 나올 때는 경매장이 장관이다. 최고를 구하려고 중매인을 내세운다. 폭과 두께를 재고, 윤기가 살아있나 보고, 배도 슬쩍 만져 돌처럼 단단하면 돈을 부른다. 나는 대개 원하는 생선을 낙찰받는다. 남들보다 비싸게 부르기 때문이다. 비싸게 사야 맘이 편하다. 민어회와 민어전은 선비 같은 맛이다. 민어탕은 뽀얗고 고소하다. 작가로서 민어맛만 한 격을 갖춘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음식은 혼자 먹는 게 아니다. 내가 낙찰받은 민어를 들고 가 요리하는 식당은 어느 포구 뒷골목에나 있을 법한 식당이다. 수수해서 함께한 분들이 더 좋아한다. 여럿을 불러 먹으면 신통하게 맛이 더 난다. 나오는 이야기도 다 솔직하다. '민어'라는 이름에 백성 '민(民)' 자가 들어 있어 더 좋다.

생선가게 아주머니는 내게 묻는다. "집에서도 생선 고르듯이 그렇게 까다롭게 구느냐"고. 생선 고를 때만은 유독 예민해진다. 청어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15~18마리 한 상자를 1만원이면 산다. 청어 곤이(鯤魚而)를 살짝 구우면 따뜻하고 고소해서 입안에서 녹을 때는 부드러운 크림 같다. 일고여덟 명이 나누는 '1만원의 행복'이다. 생선은 망둥이든 꼴뚜기든,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도 제철과 신선도만 잘 따지면 입맛을 버리지 않는다. 입에 맞추려고 양념을 많이 하면 재료를 망친다. 그들 고유의 맛, 그들이 하고픈 맛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입안이 풍요로워지는 길이다.

이렇게 식재료를 구하다 보니 내 작업에서도 재료가 중요해졌다. 침목(枕木)이나 아스콘…. 하찮고 폐기된 물건을 잘 들여다보면 그 재료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가 읽힌다. 그를 존중해 잘 끌어올려주면 작품이 된다.

음식이 주는 행복은 누구와 더불어 먹느냐에 달려 있다. 누구를 불러 이 맛있는 것을 먹을까, 나보다 더 맛있게 먹을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면 나는 금세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런 것을 '밥상머리 행복'이라 부르면 안 될까. '무엇을 먹을까'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멀지 않은 듯하다.

☞정현(57)

홍익대 미대 교수. 1956년 인천 출생, 홍익대 조소과와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침목, 아스콘 등 폐자재를 이용해 인체를 표현한 반(半)추상작품으로 유명하다.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노량진 수산시장에선 인사하느라 길 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