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DNA가 한·일 운명 바꿨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매출 200조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인 29조원의 영업이익을 냈다고 한다. 소니나 파나소닉, 샤프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업체들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엔 D램 반도체 세계 3위였던 엘피다메모리가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왜 일본의 전자산업은 벼랑 끝에 내몰리고 만 것일까? 나는 이런 상황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머지않아 자동차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는 1987년부터 삼성전자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당시 삼성전자는 아시아의 2류 업체로 치부됐고, '싸고 질 낮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실제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삼성은 일본 기업 따라잡기를 목표로 내세웠고, '모방'에 가까운 제품을 일본 제품보다 20% 정도 싸게 판매하는 게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그러나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삼성의 개혁이 시작됐다. 이 회장이 이 같은 선언을 한 것은 당시 삼성의 체질에 불만을 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환경의 변화를 민감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경영자의 장기적인 안목이 기업 경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변화를 예견한 프랑크푸르트 선언

1997년 말 IMF사태가 터지자 삼성그룹도 개혁에 나섰다. 당시 IMF를 "I'm fighting(나는 싸운다)"이라고 외치며 단기간에 위기를 극복한 한국인들에 대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삼성의 개혁에도 이처럼 긍정적이고 대담한 정신이 배어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경제는 두 가지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첫째는 저임금 생산 기지에 지나지 않았던 신흥국이 하이테크 제품(휴대전화·TV·VTR 등)을 만드는 생산국으로 발돋움하고, 나아가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비국가로 변모하게 됐다는 점이다.

둘째는 '디지털 제조업'으로의 이행이다. 디지털 제조업이란 간단히 말해 설계에서 양산까지의 설계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요소 기술의 '모듈화(단위 부품이 통합)'도 진전돼 기존의 선도업체뿐만 아니라 어느 국가의 어느 업체라도 예전보다 쉽게 첨단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아날로그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의 축적, 경험의 축적에 기반한 것이고 오랜 시간이 있어야 쌓인다. 반면 디지털 시대엔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신제품을 남보다 빨리 개발하는 것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삼성전자는 이런 시대 변화에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반면 일본 제조업은 디지털 제조업으로의 이행에 뒤처지면서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빠른 속도야말로 디지털 시대 글로벌 경쟁에서 가장 요구되는 능력이다. 한국에는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는 반면, 일본에는 '100리 길도 99리를 가야 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발상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속담 모두 깊은 뜻이 담겨 있지만, '어찌 됐든 시작이 중요하다'는 한국인의 발상이 요즘 같은 시대에 유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본 기업은 지금까지 자국 내 기업끼리 경쟁하며 '지난번엔 이겼지만 이번엔 졌다'는 식으로 '리그전(戰)'을 계속해 왔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전 세계 기업을 상대로 한 '토너먼트전'으로 무대가 옮겨졌다. 리그전과는 달리 토너먼트전은 한 번 지면 다음이 없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빠른 결정력이다. 상품 개발, 판매, 해외 진출, 다른 기업과의 제휴, M&A 모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다가는 다른 기업에 추월당하고 만다.

'선견지명'과 '무모한 투자'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경영자는 '무모한 투자'를 두려워하고, 한국의 경영자는 '선견지명'을 선택한다고 할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긍정적으로 다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실패를 반복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도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