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京원을 굴리는 사람들] 지구 반대편 콩값에도 촉각… 365일 긴장 못늦춰

"어제 비철금속 시장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 연준의 양적 완화 조기 중단에 대한 우려로 대부분 품목이 약세장이었는데, 알루미늄과 아연은 가격 하락 압력이 더욱 심했습니다."

"원유 시장은 어땠어? 과잉 공급 물량 해소가 됐나? 곡물은 어제도 조용했고?"

"과잉 공급에 대한 기대감에 WTI(서부텍사스원유) 수급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급 과잉 해소가 기대되면서 WTI 관련한 스프레드(가격 차이)가 지난 9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요, 오늘은 6개월 만에 가격이 최저로 떨어지면서 저가 매수세 유입으로 가격이 반등하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곡물은 아직 큰 움직임이 없습니다. 곡물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이번 주 발표될 USDA(미 농무부) 재고 및 생산량인데, 발표 때까지는 조용할 것 같습니다."

지난 8일 오전 7시 40분 서울 세종로 삼성선물 사무실. 수십 개의 원자재 가격 그래프가 떠 있는 모니터 앞에 이 회사 원자재 선물(先物) 브로커 5명이 모였다. 이 중 2명은 전날 오후 10시에 출근해 밤샘 근무를 한 후 퇴근을 앞두고 있었고, 나머지 브로커들은 오전 7시쯤 출근해 미국 투자은행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읽은 참이었다. 이 자리에 없는 다른 브로커 2명은 유럽 시장이 열리는 오후 5시에 출근해 새벽 3시에 퇴근한다.

회의는 밤사이 시카고 선물거래소 등 미국 시장의 상황과 이날 발표될 주요 지표들을 예측하고 전략을 짜는 자리였다. 비철금속(철이 아닌 금속), 원유, 곡물, 금 등 원자재 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오갔다. 회의는 약 15분 만에 끝났고 브로커들은 거래 준비를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유태원 팀장은 "전 세계 원자재 선물 시장을 상대하기 때문에 사실상 온종일 거래가 이어진다. 미국 시카고와 뉴욕 선물거래소의 전산 거래가 오전 8시에 시작되고 이후 아시아, 오후엔 유럽 시장 등이 연달아 열리기 때문에 24시간 중 단 30분을 빼곤 시장 상황을 기민하게 모니터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자재 선물 브로커는 각종 원자재의 가격이 변하는 데 대한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선물 거래를 중개하는 사람들이다. 원자재 선물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올리브 거래로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최초의 파생 상품(기초 자산의 가치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금융상품) 거래라고 전해진다. 이후 18세기 초 일본에 쌀 선물 시장이 생겼고, 19세기 미국 시카고에 곡물·가축 선물 시장이 생겼다.

삼성선물 상품선물팀은 전 세계 33개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약 130가지 원자재 선물을 취급한다. 한국에서 하루 평균 약 30억달러의 해외 선물 거래가 이뤄진다. 2년차인 김덕오 주임은 "새해 첫날에도 인도 시장은 열리고, 크리스마스에도 일본과 중국 시장은 쉬지 않기 때문에 매주 토·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설·추석 연휴 포함해 모두 근무해야 한다. 전 세계가 모두 함께 쉬는 '공통 공휴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 팀에 와서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오전 8시 30분. 김덕오 주임의 자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들에게 브라질 국채를 많이 판 어느 증권사의 자금 담당이었다. 김 주임이 답했다. "헤알화(브라질 통화) 헤지 원하신다고요? BM&F(브라질 상품·선물거래소)에서 선물 거래가 가능하신데요, 제가 오늘 오후쯤에 방문해서 전략 상의드리겠습니다."

오후 늦게는 이 회사의 고객사인 시화공단의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A사 사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이 사장은 최근 알루미늄과 아연 가격이 자꾸 내려가는 것 같다며, 지난달에 구매한 이 금속들의 재고가 있는데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연준이 양적 완화를 중단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으로 금속 가격이 계속 내려가고 있다"는 설명을 들은 이 사장은 재고 가격 하락에 대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런던금속거래소에 알루미늄과 아연 선물을 각각 4계약(1계약은 25t)씩 팔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 주임은 약 30초 만에 전문 프로그램을 사용한 전산 작업을 통해 거래를 완료했다. A사 사장은 앞으로 알루미늄과 아연 가격이 어떻게 변하든 약정된 가격에 팔 수 있게 됐다.

각종 원자재를 수입해서 써야 하는 A사 같은 중소 제조업체들은 이 팀의 가장 중요한 고객 중 하나다. 브로커들은 돌아가면서 전국의 공단을 방문해 선물 헤지(가격 변동 위험 완화)의 중요성을 기업체 담당자들에게 설명한다. 기업마다 재무 상황이나 수입하는 물품, 사업 전략이 다르기 때문에 개별적인 헤지 전략이 필요하다. 선물 브로커는 기업체를 위한 헤지 전략을 짜주는, 기업을 위한 컨설턴트 역할까지 겸한다. 유태원 팀장은 "지난해 주요 나라들의 정권 교체에 따른 불확실성과 각국의 경쟁적인 '돈 풀기'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원자재 가격은 예전보다 큰 폭으로 출렁이고 있다. 선물을 투기로 보는 일부 투자자가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원자재 선물 거래의 본질은 미래의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여 기업이 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업 계획을 짜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재 선물(原資材先物·commodity futures) 거래

선물(先物) 거래는 미래의 정해진 시점에 특정 상품을 약정한 가격으로 사겠다고 약속하는 거래를 뜻한다. 원자재 선물이란 농축산물, 귀금속, 원유 등 원자재를 매매 대상으로 하는 선물을 일컬으며 흔히 ‘상품 선물’이라고 한다. 주가지수 등을 기초 자산으로 하는 금융 선물과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