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안될 땐 주제 바꿔 '상자 밖 협상' 전략을 써라

얼마 전 프로야구선수 류현진이 LA다저스와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운 스콧 보라스(Scott Boras)의 '벼랑 끝 전술'이 화제가 되었다. 보라스는 LA다저스가 흥행성이 높고 구단에 꼭 필요한 류현진을 강력히 원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LA다저스와 막판까지 밀고 당긴 끝에 3600만달러(6년치)라는 거액의 연봉은 물론 선수 동의 없이는 마이너리그로 보내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얻어냈다. 사실 스포츠계보다 더 많고 다양한 협상이 벌어지는 무대가 바로 비즈니스 세계다. 이번 스콧 보라스의 협상을 지켜보면서 20여년 전의 한 협상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삼성전자 직원이었던 필자는 독일에 있는 유명 브랜드 전자회사와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주문자 상표 거래) 방식으로 VTR(Video Tape Recorder)을 거래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처음 선적한 신모델 일부에 품질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의 잘못이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 했지만, 문제는 그들의 요구가 너무 과도하다는 데 있었다. 담당 바이어는 문제가 된 선적분 모델뿐 아니라 그 모델의 재고 전부를 회수하고, 완전히 새 모델로 교체해달라고 요구했다. 회수비용도 문제지만 모두 새 모델로 바꿔 달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나는 급히 독일로 출장을 가 불량이 생긴 선적분에 한해 전수 검사를 하고 불량품은 현지에 우리 기술자를 파견하여 수리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바이어가 자기들의 당초 요구만 고집하는 바람에 협상이 사흘 동안 한 치의 진전도 없었다.

◇느닷없는 질문, "우리가 얼마나 더 살까요?"

나흘째 되던 날도 똑같은 입장을 고수하는 바이어에게 필자가 당돌하게 물었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 같습니까?"

내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니, 상대는 약간 황당해하는 것 같았다.

"나요? 글쎄, 한 30년 정도는 살겠지요? 그런데 왜요?"

당시 그는 50대 초반이었는데 평균수명을 80세 정도로 잡아 계산했던 모양이다.

"날짜로는 얼마나 될까요?"

"한 1만일 정도…."

"그렇겠네요. 30년을 날짜로 계산하면 한 1만일 정도겠지요. 그런데 그 1만일 중에서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날은 며칠 안 됩니다. 한 5000일이나 될까요? 은퇴를 빨리 하면 3000일이 될 수도 있고요."

"흠… 그렇네요."

"저는 조금 젊으니까 며칠 더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정말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3000일 중에 무려 3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냈어요. 우리 모두에게 무척 아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서로가 조금만 양보하면, 우리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는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순간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쟁점 아닌 '미래 관계 생각해보자'로 실마리 찾아

그때 필자가 질문을 이어갔다.

"이 클레임은 어떡하든 결론이 나겠지요. 그런데 앞으로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세요?"

발주한 물량만 구매하고 거래를 그만둘 것인지 계속할 것인지, 앞으로 6개월 또는 1년 후에 우리 두 회사의 관계를 어떤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이 질문은 이번 협상 결과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이 협상도 우리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즉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완고한 자세가 조금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윗사람과 의논을 하겠다고 나갔던 그가 잠시 후 비교적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나흘째 평행선을 달리던 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됐다.

또다시 유사한 품질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모델 생산을 중단하고 새 모델로 바꾸어 주겠다는 조건을 붙여 바이어의 입장을 살려주면서 우리의 원안대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골치 아픈 문제도 해결했지만 그런 협상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입장을 더욱 이해하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 회사가 삼성과의 거래를 시작한 것이 그의 단독 결정이었는데 몇 번의 품질 문제로 회사 내 그의 입장이 무척 어렵게 되자 그렇게 밀어붙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상의 인연과 사람의 미래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몇 년 후 필자가 독일에 주재하게 되었을 때, 그는 회사를 은퇴한 뒤 삼성의 고문으로 독일 전자업계와 삼성 간에 가교를 만드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주제 밖의 이야기가 협상 돌파구 된다

당시 필자가 협상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전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저녁 자리에서 한국 기업의 직원 은퇴 나이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은퇴 시기와 관련해서 많은 우려가 있는 것으로 짐작하던 차에 그의 가슴에 와 닿는 화두를 던진 것이다.

첨예한 대립이 지속될 때, 뜬금없이 주제와 떨어진 화두를 꺼냈던 것도 나름의 의도가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상자 밖 협상' 전략이 될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자신이 관철할 목표만 이야기한다. 각자의 입장만 내세우다 보니 좀처럼 타협이 이뤄지지 않고 때론 감정이 격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 테이블 밖의 이야기, 즉 협상 주제 밖의 이야기를 통하여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 상호 간에 지속적인 관계가 요구되는 거래 상대방과의 협상일수록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협상 이후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창의성과 창조경영을 강조하면서 흔히 '상자 밖에서 생각하라'는 주문을 하는데, 협상에서도 '상자 밖 생각'이 필요하다.

☞상자 밖 협상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상자 밖 생각’ 개념에서 나온 협상 전략.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협상 주제 밖의 이야기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