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재즈란… 사명이 아닌 사랑, 그저 끝없는 사랑

지난 8일 밤 서울 서초구 재즈클럽 '야누스'. 10여개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이 감미로운 리듬에 흔들렸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으로 이뤄진 재즈 트리오의 부드러운 선율이 작은 공간을 푸근하게 채웠다. 이윽고 나이 지긋한 여성 보컬리스트가 무대에 올라 눈을 감고 세월이 담긴 목소리를 들려줬다. 우리나라 1세대 재즈 보컬리스트이자 '한국 재즈계의 대모(代母)'라 불리는 박성연이다.

그가 이달 말 자신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 1986년 1집과 1998년 2집에 이어 15년 만의 앨범이다. 이날 '야누스'에서 만난 박성연은 "5년간 준비했으며 현재 앨범 재킷 디자인을 최종 수정하고 있다"며 "그동안은 무대 공연에만 집중해 앨범을 꼭 내야겠다는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해온 음악적 작업을 한번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새 앨범 '박성연 위드 스트링즈(With Strings)'에는 자신의 대표곡 '물안개'를 비롯, '안토니오스 송' '스타더스트' '에브리타임 위 세이 굿바이' 등 13곡의 재즈 명곡이 수록된다. 현악 20중주가 세션으로 참여해 풍성한 소리를 들려준다. 박성연은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등 당대의 재즈 보컬리스트들도 연륜이 쌓인 후에야 이런 형식의 앨범을 만들었다"며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라 감사했다"고 했다. 앨범 제작을 함께 하고 있는 재즈평론가 하종욱씨는 "우리나라 재즈계에서 박성연이라는 뮤지션이 가졌던 위상이나 가치에 알맞은 형식으로 앨범을 제작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리 들어본 앨범 속 박성연의 보컬은 때로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깊고 진하다. " '물안개'와 '안토니오스 송'이 수록된 27년 전 1집과 이번 앨범을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을 겁니다. 난 솔직히 지금 내 목소리에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더 깊어졌다고 좋아해주네요. 재즈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 세월에 따라 노래하는 목소리도 깊어지고, 인생이 변하고 쌓이듯 그렇게 재즈도 변하는 거죠."

1960년대 말 미8군 무대에서 시작해 한평생 재즈 외길을 걸어온 박성연은 1978년 국내 첫 재즈클럽 '야누스'를 열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야누스 무대를 거치지 않은 국내 재즈 뮤지션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경영난으로 장소를 수차례 옮겼고, 운영비 마련을 위해 애지중지하던 LP를 1000장이나 팔기도 했지만 아직도 지하철 2호선 교대역 주변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박성연을 만난 이날도 클럽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는 "내가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인 야누스가 없으면 내 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 때문에 노래하고 이것 때문에 산다"고 했다. "손님을 끌기 위해 재즈 이외의 장르도 하라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지만 내가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답니다."

그는 작년 대중문화 발전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박성연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교수직 제의도 여러 번 받았는데 그런 것들에 노래하는 기(氣)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다 거절했다"고 했다. "결혼도 안 하고 일평생 재즈만 한 것에 후회는 없어요. 난 가족이 없으니까 오직 노래를 위해 살 수 있죠. 잡념(雜念) 없이 순수하게 재즈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젊은 영감'을 강조하며 자신의 나이를 밝히지 않는 박성연이지만 노화라는 자연의 순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10여 년째 앓아온 신부전증이 건강을 악화시키면서 힘겨울 때도 많다. 박성연은 "사실 이번 앨범 제작은 어떤 위기감에서 시작된 것 같다"며 "그래도 이번 앨범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사명감으로 야누스를 운영하고 재즈를 한다고 말해요. 그런데 그거 아니거든요. 난 그냥 재즈를 사랑하는 거예요. 사명감은 끝이 있지만 사랑은 끝이 없잖아요. 난 평생 재즈를 사랑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그리고 죽는 날까지 노래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