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얘기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피난처

송해성 감독의 영화 '고령화 가족' 촬영 막바지였던 지난 연말. 배우 윤여정(66)씨는 유행성 독감으로 쓰러졌다. 고열과 구토가 10여 일간 계속됐고, 윤씨는 1966년 탤런트 데뷔 이후 난생처음으로 촬영장에 못 나갔다. "평생 처음이에요. TV 드라마는 응급실에 누워 있다가도 일어나야 하지만, 영화는 촬영 스케줄을 미뤄주는 걸 보면 그래도 인간미가 있어요."

윤씨가 잔병치레를 하고 나면 습관처럼 찾는 곳이 피아니스트 신수정(71·서울대 전 음대 학장) 명예교수의 서울 방배동 자택이다. 신 교수는 다섯 살 아래의 친구 윤씨를 위해 이날 부산에서 공수해온 밤을 구워 내놓았다. "요즘엔 밤이 영 크기만 하고, 고소한 맛이 없어. 그래도 이건 작아서 맛이 살아있네. 모든 음식에서 향기가 사라지는 세상이야."(신수정)

밤에서 시작한 둘의 응접실 대화 주제는 대중문화와 클래식 음악, 연기와 연주의 관계로 쉼 없이 이어졌다. "영화관에 입장할 때는 '어떻게 여기에 오셨어요'라고 묻지 않는데 클래식 음악회장에 들어갈 때는 유독 그렇게 물어요."(신수정) "배우는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순간에 그 생명이 끝나지만, 연주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간직한 것 같아서 솔직히 부럽죠."(윤여정)

나이도, 분야도 다른 이들의 우정이 시작된 건 1989년 즈음. 신수정과 화가 신수희 자매, 요리연구가 장선용, 불문학자 오증자, 배우 윤여정씨 등 문화계 여성 인사들이 신 교수 집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이 집은 문화계의 사랑방이 됐고, 언론인 장명수씨는 '수선회'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수선화 같은 여인들의 모임인 줄 알았더니, '수'정이네 집에서 '선'용이가 차려준 음식을 먹는 모임이라는 뜻이더라고."(신수정) "하긴 우리가 수선화와는 좀 거리가 멀지."(윤여정)

배우는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살지만, 때로는 그 대중이 두렵다. 윤씨가 말했다. "그럴 때 이 집은 내게 피난처나 안식처가 되더라고. 영화계나 방송국에 대해 아무리 불평해도 신 교수는 정작 못 알아들으니 '보안 유지'도 잘되고." 신 교수는 드라마 대장금의 이영애씨와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하는 '연예계 까막눈'이다.

이들의 우정은 한 차례 공동작업으로 이어졌다. 2008년 여름 대관령국제음악제. 한국계 작곡가 얼 킴의 작품에서 배우 윤씨가 낭독을 맡았다. 이때 신 교수는 피아노 연주 대신 그 악보를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를 자청했다. 윤씨가 제때 낭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신 교수는 고갯짓으로 몰래 사인을 보내줬다.

"난 어릴 적에 단체 줄넘기를 하면 그 줄에 들어가는 것도 두려웠던 '음치', '박치'예요. 그런 내가 '신수정과 한 무대에 선 사람'으로 기록되다니."(윤여정)

대화 도중에도 이들은 가끔 응접실의 빈자리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화가 김점선씨, 수필가 장영희 교수 등 이 탁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벗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해인 수녀는 "신수정씨의 테이블에 있던 사람은 다 떠나갔네"라는 말로 그 쓸쓸함을 표현했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는데, 실은 우리가 시간보다 더 빨리 지나가는 걸지도 모르지."(신수정)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던 날, 태어나서 가장 서럽게 울었어요."(윤여정) 이 배우는 또다시 눈물을 보였다.

와인과 치즈, 군밤을 곁들인 대화를 마친 뒤, 이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올해는 드라마는 잠시 쉬고, 영화에 집중하려고. 피렌체에서 자전거 타는 역할이라고? 나이 들수록 겉멋 드는 역은 싫어지네." 윤씨가 바쁘게 섭외 전화를 받는 동안, 신 교수는 청국장을 끓이기 위해 호박을 썰었다. 건너편 부엌에서는 조용히 도마 소리만이 들린다. 이들에게는 이 응접실이 '힐링 캠프'다.

☞신수정 교수

초등생 때부터 국내 콩쿠르를 휩쓴 ‘피아노 신동’. 오스트리아 빈 음대에서 수학하고 26세에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로 부임했다. 배우 윤여정씨는 “우리 세대의 아이돌 스타는 대중 가수가 아니라 피아니스트 신수정”이라고 했다.

☞윤여정씨

1966년 TBC 공채 탤런트로 방송에 입문하고 1970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로 존재감을 아로새겼다. 40년 후 임상수 감독의 ‘하녀’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신수정 교수는 “윤여정이 장희빈을 맡았을 적부터 팬”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