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이 다 무너지면 전시는 끝납니다

허무에서 희망을 건져올리는 게 예술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전시는 적지 않은 위안을 줄 것 같다. 서울 동숭동 갤러리정미소에서 다음 달 7일까지 열리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예찬1'. 30대 중·후반 작가 5명이 참여한 전시는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틋한 송가(頌歌)다.

1970년대 '양옥(洋屋)'은 부(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한때의 '세련됨'을 '촌스러움'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세월이다. 조각가 김주리(33)는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서울 휘경동, 한남동 일대 양옥들을 흙으로 빚었다. 계단, 창문, 벽돌 하나하나의 디테일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높이 45~50㎝가량의 미니어처. 전시장에 지어놓은 일곱 채의 흙 양옥에, 매일 2~3번씩 물을 뿌린다. 물 먹은 흙집은 서서히 무너져간다. 양옥이 우리 주변에서 자취를 감춰가듯.

헨델의 '사제 사독(Zadok the priest)'이 흘러나온다. 영국 왕 대관식 때 쓰이는 곡이다. 장중한 선율을 따라 걸어가면 가로 5m, 세로 2.8m짜리 스크린 속에서, 커다란 그라인더(grinder·가는 기계)가 바삐 움직인다. 그라인더는 하나둘씩 체스판의 말을 갈아 없앤다. 장엄한 합창이 장렬히 전사(戰死)하는 말들을 위한 장송곡이 될 때, 톱밥 속에서 최후의 승자(勝者)가 모습을 드러낸다. '퀸(Queen)'. 2분 50초짜리 영상의 제목은 'God save the Queen(신이여 여왕을 구원하소서)'. 재영(在英) 설치미술가 신기운(37)의 작품. 시계, 돈 등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오브제를 갈아 없애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온 작가는 이번엔 정치판의 권력무상을 주제로 삼았다. 영국 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그라인더가 '퀸'만 갈아 없애는 'God Kill the Queen(신이여 여왕을 참하소서)'도 함께 내놓은 작가는 말한다. "지난번 한국 대선의 핵심인 '여왕을 살리느냐, 잡느냐'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축소판인 체스판을 통해 표현해보고 싶었다."

발아래에서, 바닥이 부서진다. 관객의 걸음걸음마다 갈라진 바닥은 결국 고운 흰 입자가 되어 쌓인다. 조각가 정재욱(33)은 두께 0.2~0.3㎜, 가로·세로 50㎝짜리 얇디얇은 석고판 420장을 전시장 바닥에 깔았다. 관람객들은 다른 작품을 관람하는 동시에 정재욱 작품을 망가뜨리게 된다. 그러나 형체가 망가졌다고 해서 무화(無化)되는 것이 예술인가. 이 작업의 핵심은 제목에 있다. '걸음이 옮겨지자, 눈이 내린다'. 부서짐으로써 서정성을 얻어 아름다워진 이 작업처럼, 예술이란 영원함과 영원하지 않음의 경계에 있는 것.

전시를 기획한 이은주(35) 갤러리정미소 큐레이터는 "동년배 작가들은 '덧없음'을 어떻게 긍정하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02) 743-5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