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비 한 푼 없고 오디션도 아닌데… 2만명이 제발로 왔다

지난 19일 오후 2시 서울 코엑스의 한 전시장엔 25개의 면접용 부스가 설치돼 있었다. 각 부스 앞에 놓인 대기석엔 각각 10여명씩 모두 300여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드라마 대본이 적힌 A4용지 2장을 쥐고 있었다. 몇몇은 고개를 숙인 채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면서 소리 내 읽었다. 내용을 녹음한 뒤 이어폰을 끼고 들어보거나 벽을 보고 대본을 외우기도 했다. 대본을 연습하면서도 진행요원이 자신을 호명하는지 계속 힐끗거렸다. 이름이 불리면 한 명씩 부스에 들어갔다. 짧은 자기소개를 하고 대본을 낭독했다. 현직 성우가 헤드폰을 끼고 음성을 평가했다. 한 명당 인터뷰는 1~2분씩. 이렇게 이틀(19~20일)간 2만명이 이 부스들을 찾았다.

방송사의 유명 오디션이나 아나운서·성우 채용 시험장이 아니었다. 한 외국계 은행이 시각장애인용 오디오북을 만들면서 음성을 기부할 '재능 기부자'를 뽑는 자리였다.

선발되더라도 보수는 한 푼도 없다. 시각장애인용 오디오북의 목소리 기부자이니 '스타'가 될 가능성도 낮다. 은행 취업에 가산점이 붙는 인턴 프로그램도 아니다. 최종 100명만 뽑는 200대1의 경쟁률이니, 왔다가 탈락해 헛걸음칠 가능성도 더 높다. 이런 아무런 대가가 없는 일에 2만명이 몰렸다. 시각장애인 동생을 둔 누나와 형, 학창시절 방송반을 했던 주부, 장애가 있는 지체장애인, 성우 지망생 등이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면서 몰려들었다.

김아라(29)씨는 "10세 터울 남동생이 시각장애인이라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의 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미숙아망막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신간을 읽을 때마다 '동생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오디오북이나 점자책이 없어 아쉬웠다"고 말했다. 김씨가 대본을 읽는 도중 심사위원은 "목소리는 편안한데 좀 천천히 읽어보라"고 말했다. 김씨는 "너무 떨려 말이 빨라졌다"며 동생과 대화하듯 대본을 읽어나갔다.

경기도 평택에서 온 김창옥(51·공무원)씨는 "예상보다 사람이 많이 참여해 깜짝 놀랐다"고 했다. 김씨는 20여년 전 뇌종양 수술을 하다 시력을 잃은 동생(48)이 있다. "스무 살까지 앞이 보이다가 갑자기 시력을 잃어 많이 힘들어했다"며 "동생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인 성우 이선영씨는 "참가자의 애절한 사연이나 경력을 보고 뽑는 것은 아니다"면서 "무료로 하는 재능기부라고 해도 음성·발음·표현력 등이 잘 갖춰진 사람을 선발한다"고 말했다.

초·중·고교에서 방송반 활동을 했던 김경희(26)씨는 "회사에서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며 "목소리 기부를 하게 되면 시각장애인을 도울 수 있어 좋고, 뽑히지 않더라도 현직 성우에게 면접을 볼 수 있으니 재밌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인천에서 온 전현주(46)씨는 "나이가 들수록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심사를 하던 성우 탁원제씨가 "목소리는 좋은데 단어 마디마다 끊어 읽다 보니 반 옥타브씩 높아진다"며 "이번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도전하라"고 말했다. 전씨는 "가족들과 함께 인천에서 아침부터 왔다. 다시 하게 해달라"며 적극성을 보여 결국 면접을 통과했다.

암 투병을 했던 이희빈(54)씨는 "두 번 사는 인생이라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면서 "'내게 어떤 재능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학창시절 목소리가 좋다고 성우 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휠체어를 타고온 장애인인 배모(28)씨는 "대학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해 구연동화를 많이 해 오디오북에 적합할 것 같아 지원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최수진(25)씨는 심사위원에게 중고교와 대학 때 방송반 경험을 말하며 자신을 홍보했다. 최씨는 "솔직히 입사 면접보다 훨씬 떨렸다"며 "그동안 좋은 일 하려고 해도 방법을 몰랐는데 시각장애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TV·라디오 리포터로 활동하는 박초연(32)씨도 참가했다. 오디션을 위해 행사 며칠 전부터 매일 소리 내 책을 읽었다. 주말에는 시각장애인용 해설 방송 대본을 찾아 연습도 했다. 박씨는 "유명해지거나 물질적 대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23일 최종 합격자 100명이 발표됐다. 1만9900여명은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