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채성진 기자의 探人探事] 바둑 9단 남편, 그를 조련한 바둑행정 9단 아내… 오십줄에야 웃다

산전수전 다 겪은 승부사의 뺨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우승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해서….” 절정의 기재(棋才)를 뽐내는 고수(高手)들이 즐비한 바둑계에서 50이 넘은 나이에 정상에 오른 서능욱(55) 九단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전광석화 같은 속기(速棋)로 19로(路) 바둑판 위에서 벌인 전투가 1700여 합(合). 눈앞에서 놓친 우승이 몇 번이었나. 13전 14기. 맺지 못한 인연은 뒤늦게, 잇따라 찾아왔다. 2011년 말 프로 시니어 최강전인 제2회 대주배에서 평생 넘지 못했던 조훈현을 불계로 꺾고 생애 첫 정상 등극의 감격을 맛보더니 지난 9일에는 서봉수를 상대로 불계승을 거두며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무관(無冠)의 기사(棋士), 만년 2인자로 불리던 서능욱은 지천명(知天命)을 넘은 나이에 펄펄 날고 있다.
서능욱은 “입단한 지 41년이 지났는데 요즘처럼 신나는 때가 없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 예전에는 막 뒀다고 봐야지. 우승한 뒤에는 내가 봐도 내가 달라졌다. 한 판 한 판 정성 들여 둔다. 기보(棋譜) 연구도 다시 시작했다.”

◇"절정의 쾌감… 요즘 바둑이 더 재미있다"

―첫 우승 뒤 여한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가.

"이기면 또 이기고 싶다. 우승은 할수록 좋다. 절정의 쾌감! 안 해 본 사람은 이 맛을 모른다. 사실 첫 우승은 얼떨떨했다. 나이 먹어서, 기대를 안 하다 받았으니까. 50세 이상만 나오는 상금 1000만원짜리 시니어대회에서 우승한 게 뭐 그리 대수냐는 사람도 있다. 난 신경 쓰지 않는다. 두 번째 우승 때는 기쁨이 몇 배 더 컸다.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제2의 전성기'라는 말에 동의하나.

"그런 것 같다. 우승한 뒤 자신감이 부쩍 커졌다. 바둑이 재미있다. 바둑을 공부하게 된다. 나이 50이 될 때까지 어떻게든 타이틀 한번 차지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러다 포기했다. 젊은 애들이 너무 잘하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아니다 싶은 바둑이면 대충 두다가 돌을 거뒀다. 편하게 두기로 했다. 안 마시던 술도 입에 댔다. 지금은 대국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예전처럼 여러 판 승부에, 제한 시간도 길었다면 우승이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가 있던데.

"인정한다. 한데 세상은 바뀐다. 나 같은 스타일에도 볕 들 날 있는 거다. 우승은 하늘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엎치락뒤치락 박빙 승부에선 운이 자신을 선택해줘야 하는 거니까. 이참에 고백할 게 있다. 대주배 우승은 좀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다. 2010년 1회 대회 때 날짜를 착각해 기권패 당한 걸 집사람은 모른다."

―프로 기사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16강전을 무난히 통과했다. 8강전 일정은 주최 측에서 당연히 알려주려니 싶었다.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왜 대국장에 안 나왔느냐고. 무슨 소리냐 했더니 나눠 준 일정표를 잘 보라고 하더라. 바보같이 자기 시합 날도 모르고…. 집사람이 눈치챌까 봐 말도 크게 못 했다. 심하게 자책했다."

◇인터넷서 하루 20~30판… 1만200승 질주

서능욱은 작년 8월 지지옥션배에서 프로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한국기원 기록에 따르면 23일 현재 1009승5무709패다. 조훈현(1879승), 이창호(1614승), 서봉수(1514승), 유창혁(1173승)에 이어 역대 5위다. 요즘 서능욱은 인터넷 바둑에 푹 빠져 산다. 오전 8시쯤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대국 신청이 들어오면 무조건 받아준다. 매일 20판에서 30판 정도 둔다. 컴퓨터 앞에서 바둑 두면서 대충 끼니를 때울 때도 많다. 작년에 1만승을 넘었다. 현재 통산 전적은 1만264승192무6166패다.

―일상생활이 제대로 되는가.

"보통 새벽 2시쯤 대국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날이 있다. 9단에서 8단으로 강등당하는 날이다. 누워도 잠이 안 온다. 승단하려면 20판 중 15~16판을 이겨야 한다. 새벽 하늘이 벌게질 때까지 두고 또 둔다. 기어이 9단으로 올려놓고 잠자리에 든다. 그래야 푹 잔다. 미친 짓인 줄은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봐도 그렇다. 여럿이 지켜보는 대국장과 달리 내 방에서 혼자 두는 바둑이라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클릭을 잘못해 다른 곳에 착점하면 마우스를 집어던지고, 수를 제대로 읽지 못해 당했을 때는 벽에 머리를 들이박는다."

―111명을 상대로 다면기(多面棋)를 두기도 했다. 인터넷 바둑에서도 그게 가능한가.

"모니터에 창 여러 개를 띄워놓고 둔 적이 있다. 그런데 제한 시간에 몰려 실수가 나왔다. 좋은 바둑을 시간패 당한 적도 여러 번이다. 승률이 확 떨어졌다. 인터넷 바둑엔 고수(高手)가 많다. 한눈팔다 보면 순식간에 단(段)이 떨어진다."

―인터넷 바둑에서 쓰는 아이디(joonki)는 무슨 뜻인가.

"혹시 아들 이름이냐고 묻기도 하는데 아니다. 처음 아이디를 만들 때 컴퓨터 사용이 서툴렀다. 당시 집사람 회사에 이름이 이준기인 직원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 이름으로 만들어 등록해준 아이디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바둑 외에 다른 취미는 없나.

"사람들을 만나서 논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노래방에 10시간 틀어박혀 혼자 부르다 나온 적도 있다. 뭐든 한번 꽂히면 그런 식이다. 빌 게이츠, 워런 버핏이 '광팬'이라는 브리지 게임도 즐긴다. 나는 국내에 몇 명 안 되는 국가대표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당구다. 구력은 '인천 짠물'로 200점 정도. 구질구질하게 여러 번 '큐질' 하지 않고 한 번에 딱 때린다."

◇'바둑계 마당발' 부인과 30년

서능욱을 이야기하며 그의 부인 현인숙(53)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바둑협회 이사, 바둑TV 홍보 마케팅 이사 등을 지낸 현인숙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둑계의 여걸(女傑). 기전(棋戰) 유치와 광고 사업을 활발히 벌였고, 장애인 바둑 대회도 10년 넘게 후원했다. 현인숙 스스로 "서능욱씨는 아홉 구(九)자 9단, 저는 입 구(口)자 9단"이라고 할 정도로 바둑계의 대소사, 비하인드 스토리를 꿰고 있다. 바둑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각 분야에 걸쳐 마당발 인맥을 자랑한다.

사업 수완과 추진력이 대단해 '인천의 힐러리'란 얘기도 들었다. 금연초 사업 등 벌이는 일마다 재물이 붙었다. 지금은 광화문 KT 사옥의 복합 문화 공간 '올레 스퀘어'를 운영한다. 크루즈 사업도 추진 중이다. 대한체스연맹 회장과 강릉영동대 이사장 직함도 갖고 있다. 별명이 '손오공'인 서능욱에게 현인숙은 '삼장법사'다. 부인 앞에선 꼼짝 못한다. 둘은 1983년 부부가 됐다.

―올해 결혼 30주년이다.

"우리는 둘 다 인천 출신이다. 남편이 입단할 때부터 열혈 팬이던 형부가 만남을 주선했다. 젊었을 때 나를 따라다니던 대학생이 꽤 많았다. 어쩌다 보니 이 사람과 30년을 살고 있다. 키는 작았지만 포용력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기재가 출중하고 잠재력이 많은 청년 기사였다."

―남편의 승부욕이 대단하다.

"프로 기사는 평상시에는 편안한 분들이지만 바둑판 앞에 앉아 승부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확 달라진다. 승부에 대한 이 사람의 집착은 다른 기사보다 훨씬 강하다. 신혼 초에는 야생마를 길들이며 사는 것 같았다. 늘 '승부는 내 직업이고 가야 할 길'이라고 한다. 이걸 양보하면 다른 길이 없다는 거다."

―결승에서 패한 뒤에는 어땠나.

"잠수 타서 일주일 넘도록 안 들어왔다. 전화도 없고. 패배의 분을 삭이지 못해 사라진 것이라 했는데, 알고 보면 어디선가 기사들끼리 모여 마작이나 포커를 치고 있었다. 다들 지쳐 떨어질 때까지 몇 날 며칠을 그랬다. 조훈현 국수가 우승하고 이 사람이 준우승한 날도 위로 겸 축하 겸 판을 벌였다. 근데 답답한 건 거기서도 조 국수가 돈을 따는 거다. 부익부 빈익빈이 따로 없다. 바둑에서 진 걸 여기서만큼은 이기겠다고 덤비다 또 깨지는 거다."

―상금을 제대로 갖다 준 적이 없었다고 하던데.

"남편이 우승은 못 했어도 각종 대회 본선에 오르며 성적이 좋아 수입은 괜찮았다. 문제는 나에게 전달되는 '배달률'이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한 30%쯤 됐나. 그래서 수를 냈다. 정수현 사범이 기사회장을 할 때인데 상금이나 대전료를 봉투 대신 통장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배달사고'를 줄여야 하지 않겠나. 가정이 화목해야 기사들이 성적을 잘 내지 않겠느냐고 우겼다. 결국 통장 입금을 이뤄냈다."

―'남편 서능욱'은 어떤 사람인가.

"아기자기한 가정을 생각하며 결혼했는데, 이 사람은 돌부처처럼 말을 안 해 사람 복장 터지게 하는 계열이었다. 신혼 초에 많이 싸웠다. 임신중독증과 난산으로 두 아이 낳을 때 고생했는데, 그때도 병원 근처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사람이었다. 이혼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일을 하고 내 영역을 가지면서 이 사람을 이해하고 놓아주기로 했다."

◇급한 성격 고치려 염주까지 쥐여줬지만…

남산중 2학년인 1972년 입단한 서능욱은 전투형 기풍으로 이름을 날렸다. 7년 뒤 최강자전에서 시작한 준우승 징크스는 그의 바둑 인생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다. 손바람 날리며 판세를 몰고 가다가도 끝내기 고비를 넘지 못해 무너졌고, 어이없는 '덜컥수'로 다 이긴 판을 망쳤다. 1992년 최고위전에서 13번째 준우승에 그치자 바둑계에선 "서능욱은 이제 어렵다"고 했다. 남편의 급한 성격 때문에 현인숙의 애간장이 탔다.

"이 사람은 바둑만 빨리 두는 게 아니다. 밥도 후루룩 빨리 먹는다. 뭐든 순식간에 해치운다. 어렸을 적 아버님이 바둑을 가르친 것도 침착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마음을 다스리라며 내가 염주를 쥐여줬다. 대국 중에 염주 알이 반상에 우르르 쏟아지기도 했다. 하도 뱅글뱅글 돌리니까 줄이 닳아서 끊어진 것이다. 절에 데리고 가서 참선을 같이하고, 조용한 클래식 음악도 함께 들어봤다. 나이가 들면서 좀 나아지는가 했는데, 요즘 인터넷 바둑을 두면서 도로아미타불이다. 천성은 안 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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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도 '덜컥수'가 나오는가.

"없다곤 말 못 한다. 신혼 때 이 사람이 누구 보증을 잘못 서서 인천의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날린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인감도장을 내가 보관한다. 믿으면 다 주는 순진한 사람이다. 근데 이 사람이 인복(人福) 하나는 타고났다. 사정을 알고 자기 집에서 살라고 도움을 준 지인도 있었다."

―체스연맹 회장은 어떻게 맡게 된 것인가.

"대한바둑협회 이사로 있을 때 국고 지원을 받아 바둑 종주국 사업을 추진했다. 유럽에 나가 보니 우리나라의 기원이나 바둑 교실처럼 체스 클럽이 곳곳에 있었다. 바둑을 알리려면 우리가 먼저 체스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단법인 대한체스연맹을 만들어 난립해 있던 체스 관련 단체를 통합했다."

―정태수를 이긴 독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2007년 강릉영동대 이사장으로 부임한 뒤 학내외 문제로 여러 차례 소송을 겪었다. 바둑계 안팎의 폭넓은 인맥, 일 추진력을 눈여겨본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학교를 키워달라며 부탁해 맡게 된 일인데, 나중에 교비 횡령 방조 등 혐의를 써 고생했다. 작년 8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와 이사장에 복귀했다. 주변에선 '천하의 정태수를 이겼다'고 하지만 잃어버린 6년 동안 너무나 힘들었다. 묵묵히 곁에서 지켜봐 준 남편이 고맙다. 우린 동지다. 가만 보니 내 상황이 너무 안 좋아진 게 이 사람의 '헝그리 정신'을 자극해 우승한 게 아닌가 싶다."

◇"걸어오는 싸움, 절대 피하지 않는다"

힘든 시절을 전하는 현인숙을 보면서 서능욱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큰 도움이 못 돼 미안하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을까. 조훈현에게 11연패 한 뒤 달리는 택시에 뛰어들었다는 항간의 얘기에 대해 묻자 서능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도와 차도를 오가며 넋을 놓고 걷고 있었다. 패배를 곱씹으면서. 갑자기 택시가 내 앞에 탁 서더니 운전기사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죽으려면 너나 죽어.' 내가 죽긴 왜 죽나. 승부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던 시절이었는데. 진짜 힘들었던 건 재작년이었다."

―첫 우승 직전인가.

"그렇다. 집사람 일도 그랬고, 내가 사기 도박단에 당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 인간적인 배신감이 진짜 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을 때였다. 첫 우승을 하면서 드디어 운이 풀리는구나 싶었다."

작년 말 '2012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시니어상을 받은 서능욱은 "새해엔 정규 MVP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승부사로 살아온 서능욱은 '걸어오는 싸움은 절대 마다하지 않겠다'는 신조로 산다고 했다. "주먹싸움 빼고는 상대가 도전해 오면 피하지 않는다. 그게 바둑이건 인생이건. 바둑돌을 잡은 40여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