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삼각지, 장충단공원…. 추억이 서린 몇 개의 지명을 나열하다 보면 퍼뜩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다. 바로 배호다. 50대 이상 남자들이 가장 그리워한다는 가수. 그와의 짧은 재회.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람을 아쉬워하며~.” 외로운 사나이의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를 당시인 1967년, 배호(1942~1971)는 고작 스물여섯의 앳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색에는 짙은 한이 서려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영혼을 울리는 불세출의 가객’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후 배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지병인 신장염을 이기지 못한 탓이다. 병마와 싸우며 활동한 6년간 그는 총 50여 장의 음반과 300여 곡의 가요를 남겼다. 데뷔 이래 줄곧 정상을 지켰음은 물론이다. 가요상만 60여 차례 수상했다.
1. 배호의 출세곡인 ‘돌아가는 삼각지’가 수록된 앨범 이미지. 2. 1950년대 중반 부산 삼성중 시절. 3. 1960년대 중반 외삼촌 김광수가 이끄는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 활동하던 시절. 4. 타계 6개월 전인 1971년 5월 비원에서. 5. 활동 당시 무대에서 선보인 재킷과 신발. 6. ‘돌아가는 삼각지’ 악보 원본. 애당초 노래 주인은 따로 있었으나, 배호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반한 작곡가 배상태의 결정으로 배호의 차지가 됐다. 7. 배호가 사용한 도장들. 배호의 본명은 배만금, 아호는 배신웅이다. 8. 배호의 트레이드마크인 안경. 9. 한국연예협회 회원증. 10. 1971년 입원 당시 동료 가수들이 쓴 방명록.
그가 떠난 지 이제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를 향한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사후 팬클럽이 결성되는가 하면 전국 각지에 100여 개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2003년에는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1963년 취입한 데뷔곡 ‘두메산골’을 비롯해 ‘누가 울어’, ‘당신’,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그리고 1971년 타계 직전 발표한 ‘마지막 잎새’ 등은 모두 오늘날까지 널리 애송되는 곡들이다. 한국대중음악사에서 배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다. 무엇이 이토록 오랫동안 그를 음악사에,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 살도록 만든 것일까.
이에 대해, 1980년대 말부터 배호 유족을 돌보며 사후 팬클럽 창단 등에 앞장서온 정용호 씨는 “배호가 주로 활동한 시기는 1960년대 중반 보릿고개 시절이다. 그의 묵직한 보이스 컬러는 암울한 시대적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서민들이 그를 특히 좋아했다”고 말한다. 20대임에도 중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투병의 결과였다. “신장염에 걸리기 전, 즉 1966년 이전 배호의 목소리는 대체로 평범했다. 이후 투병생활을 거치면서 호소력 짙은 특유의 목소리로 변모한 것이다. 배호는 활동 중 늘상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는데, 입원 중에 취입한 노래들을 들어보면 숨이 차서 가사가 끊어지거나 힘겹게 박자를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같은 슬픔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노래에 빠져들게 한 것”이라고 정 씨는 덧붙인다. 배호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 위해 몸살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음반을 녹음하는 가수도 더러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신드롬을 알 만하다.
배호는 국내 최초로 매니저를 둔 가수답게 직업의식도 투철했다. 신장염으로 무대에서 쓰러지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나 그런 와중에도 프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관객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는 그는 쓰러지면 곧장 사회자의 등에 업혀 다시 마이크를 잡았을 정도. 배호의 인간적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1971년 11월, 영결식이 거행된 예총회관 앞 광장에는 수많은 조객으로 북적였다. 소복을 입은 팬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서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고 한다.
배호를 다시 만나는 3가지 키워드
<말로 싱즈 배호>
재즈 디바 말로가 배호의 명곡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앨범. ‘돌아가는 삼각지’는 보사노바로, ‘안개 낀 장충단공원’은 블루스로,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은 탱고로 만날 수 있다. 그간 배호의 노래들은 여러 장르로 리메이크된 바 있으나 재즈 버전은 이번이 처음. 배호와 동시대 활동했던 아코디언의 대가 심성락과 낭만가객 최백호가 피처링에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말로 싱즈 배호>는 배호 탄생 70주년이 되는 지난해 발매됐다.
<배호평전>
인간 배호와 가수 배호를 총망라한 책. ‘참 건방지게 멋있는’ 배호의 모든 것을 추적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함께 활동한 가수, 작곡가 등 관련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과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사진들이 담겨 있다. 노래 잘하는 청개구리 소년이 가수의 길로 접어들기까지, 또 병마와 싸우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켜내기까지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평론가들의 입을 통해 배호의 음악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조명한다. 김선영 저, 소담출판사.
노래주점 ‘돌아온 배호’
2007년 배호 팬들의 염원에 따라 문을 연 곳. 1980년대 후반 배호 유족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약 25년간 ‘배호지킴이’로 활동해온 정용호 씨가 직접 운영한다. 배호 팬클럽의 기틀을 다진 것은 물론, 유족을 마지막까지 돌보며 배호의 의제(義弟)가 된 정 씨가 유족으로부터 받은 각종 유품과 자료, 사진이 주점 곳곳에 전시돼 있다. 배호의 팬이라면 꼭 들러야 할 아지트. 한 달에 한 번 회원 정기모임도 마련된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 문의 02-719-5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