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1.30 09:33

SOUL FOOD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음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몸이 아닌 마음의 허기를 달래주는 소울 푸드(soul food)는 많지 않다. 추억이라는 레시피로 만들어진 당신의 소울 푸드는 무엇인가? 각계 명사들이 이야기하는 내 인생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맛!


윤종효 씰리코리아 대표

최고의 맛-남해 민물털게탕 십수 년 전 결혼 초기, 고향이 남쪽인 저는 여름휴가차 남해안 드라이브길에 나섰습니다. 고향에 들렀다 남해안 다도해로 향하던 중 하동 인근 마을을 지나는데 ‘민물털게’라고 적힌 한 식당 간판이 눈에 들어왔죠. 곧바로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향했어요. 당시 식당은 토속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작고 허름한 보통의 식당이었죠. 많지 않은 메뉴 중 민물털게탕을 주문해 먹었는데 그 독특한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바다게와는 사뭇 다른 맛…. 풍성한 민물털게에 경상도 특유의 맵싸한 양념과 갖은 야채가 버무러져 입맛을 돋웠어요. 어린 시절을 줄곧 시골에서 보낸 저는 거친 음식에 익숙한 편입니다. 민물 게알이 송송 박힌 털게를 거의 껍데기도 남기지 않은 채 먹어 치웠더니, 도시에서 곱게 자란 아내가 엄청 놀라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입이 짧은 아내 역시 게탕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마침 상 위에 오른 것이 바다게가 아닌 낯선 민물털게이다 보니 상당량을 제게 덜어주었습니다. 깊은 맛과 풍성한 양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음식, 다시 한 번 꼭 맛보고 싶네요.

함께하고 싶은 사람 아내. 다가오는 봄 결혼기념일에 즈음하여 아내와 함께 털게탕을 맛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그때의 그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습니다.


김학남 성악가·대한민국오페라단연합회 이사장

ⓒ김승완(C.영상미디어)
최고의 맛-설악산 송이된장찌개 저는 모든 음식을 다 잘 먹는 편입니다. 밥맛이 없다고 느낄 때가 거의 없죠(웃음). 특히 토속음식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설악산 송이된장찌개에 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요. 저는 오랜 세월 성악가로 활동하며 짬이 날 때마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목을 풀고 휴식을 취하곤 합니다. 몇 해 전 공연이 끝나고 가족과 설악산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였어요.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아침으로 송이된장찌개를 맛보게 된 것이죠. 송이버섯은 전국 어디에나 다 있지 않냐고요? 설악산 송이는 다르더라고요. 1㎜로 얇게 썰어낸 송이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깊은 향이 나던지요. 정말 놀랐습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생각만큼 자주 설악산에 갈 수는 없어요. 1~2년에 한번 갈 수 있는 정도이죠. 자주 맛보지 못하는 음식이라 더 간절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 중국 소망예술원 허금숙 원장님. 재작년 제 공연을 보러 한국에 오신 것이 계기가 되어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소망예술원은 4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양성하는데, 허 원장님은 이 오케스트라의 단장이시기도 합니다. 오케스트라를 통해 음악적 활동은 물론이고 봉사 등 좋은 일에도 앞장서고 계시죠. 저는 지난해 허 원장님이 중국 현지에 마련한 ‘김학남 초청 음악회’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허 원장님은 몇 해 전 50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시고는 음악과 봉사를 실천하고 계세요. 그분의 열정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분과 같이 국내에서 활동의 외연을 넓히려고 노력 중입니다. 오는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제가 예술감독을 맡은 신춘가곡제가 열립니다. 그 공연을 보러 허 원장님은 한국에 들어올 계획을 갖고 계세요. 그때 여유가 된다면 함께 설악산에 가서 송이된장찌개를 맛보고 싶습니다.


노영희 푸드스타일리스트

최고의 맛-어머니의 엿 제가 스무 살이 되던 무렵까지 어머니는 설이 다가오면 늘 분주하셨어요. 약 20일 전부터 명절 음식을 준비하셨던 거죠. 여러 음식 중 가장 먼저 만드신 게 엿이었어요. 엿을 고는 작업부터 시작하셨던 셈이에요. 쌀엿을 고기도 하고 수수엿을 고기도 하셨습니다. 쌀을 불려 갈아서 따끈하게 끓여 엿기름을 넣고 휘휘 저어 한나절 이상 삭힌 다음 고운 주머니에 넣어 짜서 맑은 국물만 준비해 하루 종일 장작불을 때는 것이죠. 불이 너무 괄면 안 된다고 장작불을 아궁이 앞으로 끌어내기도 하며 조절을 하셨어요. 불 조절은 할머님 몫이었습니다. 엿을 고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던 것 같아요. 저는 아궁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엿이 다 되길 기다리다가 그만 지쳐버리는 거죠. 지쳐서 언제 끝나는 거냐고 보채면 할머님은 ‘홑이불 거품’이 일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좁쌀만 한 크기의 거품이 보글보글 일다가 접시보다 더 큰 거품이 일기 시작하는 것, 그것을 홑이불 거품이라고 하셨죠. 거품이 인 후 숟가락으로 떠서 찬물에 떨어뜨려 보면 압니다. 찬물에 엿이 퍼지지 않으면 드디어 완성된 것입니다. 한 국자씩 퍼서 식힌 다음 둥글넓적하게 반대기를 만들어 콩가루를 묻혀두었다가 손님이 오시면 내던 그 달콤한 엿이 생각나네요.

함께하고 싶은 사람 맛난 음식을 해 주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스무 살이 된 이후로는 계속 편찮으셨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요. 때문에 그 후로는 어머니와 할머님이 고아주시던 엿을 먹은 적이 없어요. 작년에 엿을 고아본 적이 있는데, 엿이란 얼마나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음식인지 새삼 깨달았죠. 잠깐 한눈이라도 팔면 너무 고아지거나 쌀이 채 삭지 않아서 맛이 덜하기도 하더라고요. 어머니 음식 중에 술이나 보쌈김치, 무말랭이장아찌 등 배우고 싶은 게 무척 많아요.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모두 함께 맛보고 싶네요.


이재성 대장장이화덕피자 대표

ⓒ김승완(C.영상미디어)

최고의 맛-할머니의 파전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저는 하교 후 곧장 할머니 댁으로 달려가곤 했어요. 고향이 경기도 이천인데, 할머니 댁은 우리 집과 매우 가까웠죠. 제가 달려가면 할머니는 밭에서 하시던 일을 멈추시고는 흙 묻은 손을 씻고 부엌으로 향하셨어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손으로 하얀 접시를 닦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난이나 솔방울 같은 그릇의 무늬까지도요. 그런 할머니가 저를 위해 주로 해 주셨던 음식 중 하나가 파전이에요. 마당에 멍석을 깔고 허드레 깡통으로 화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솥뚜껑을 얹는 거죠. 즉석에서 장작을 지펴가면서 파전을 부치는 거예요. 담장에 호박넝쿨이 풍성했는데, 그 사이 주렁주렁 매달린 호박과 밭에 지천이던 파를 바로 따다 만든 ‘자연식 파전’…. 도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서정적인 음식이죠.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소박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넉넉했으니까요. 중학생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맛볼 수 없었던 솥뚜껑 파전, 참 그립네요. 생각해보면 오늘날 제 입이 이토록 까다로운 건 모두 할머니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저는 지금 유럽 음식을 만들고 있지만 할머니가 해 주신 음식의 얼을 되살리고 싶습니다. 잠시나마 옛날의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식기를 전부 황학동 등지의 골동품 가게에서 수집해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함께하고 싶은 사람 평소 막역한 사이인 설치미술가 윤정원과 조각가 유영호. 두 사람 모두 내 오랜 친구입니다. 추억 속 소중한 음식을 다시 맛볼 기회가 생긴다면 이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리고 성악가 조수미 선생님과 지휘자 정명훈 선생님. 저를 포함한 대중이 ‘듣는 즐거움’을 오래오래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십사 하는 의미로 두 선생님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드시게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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