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토박이 화가 사석원. 신당동에서 태어나 홍제동, 면목동, 망우리 등을 거쳐 지금의 방배동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았던 13여 개 동네를 비롯한 서울 이곳저곳에는 작가의 청춘과 추억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글과 그림을 통해 그때 그 시절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려보자.
젊은 날의 풍류와 인생을 배운 거리, 을지로
노는 것, 잘 노는 것은 내 일생일대의 최고 과제다. 그리하여 만약 훗날 내 묘비명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건 당연히 ‘잘 놀다 간다’일 것이다. 그리고 한 줄 더 쓴다면 ‘고맙다! 같이 놀아줘서…’다. 20년 전쯤, 내가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르고 마구잡이로 놀 때 강력한 빛이 되어준 스승님이 나타나셨다. 기꺼이 화류계의 대선배로서 한량의 도를 전수해주신 것이다. 선생님을 우리는 신 전무님이라고 불렀다.
을지로 | 한지에 수묵채색 | 2012作
전무라 함은 회사의 직함이지만 그분은 회사도 다니지 않았고 특별한 직업도 없으셨다. 편의상 그렇게 불렀는데 아마 예전엔 직장에서 전무의 직함으로 일하셨던 것 같다. 한량 수업은 먹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좋은 음식을 좋은 식당에서 좋은 주인을 만나 좋은 사람과 맛있게 먹는 것인데, 그 수업은 늘 을지로에서 이뤄졌다. 식당 명가가 을지로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름 진지하게 탐식을 반복했다. 1차로 많이 간 곳은 ‘조선옥’이란 을지로3가에 있는 갈빗집이다. 우리나라 소갈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 집의 역사가 무려 60년도 넘었다. 그러다 보니 시설은 낡고 어두컴컴하다. 쌈박하고 깔끔한 곳은 아니다. 연탄불에 구운 양념갈비는 달착지근하지만 느끼하지 않고 참 맛깔나다. 전부 넓적한 갈비뼈가 붙어 있어 두 손으로 뼈를 잡고 갈빗살을 앞니로 뜯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풍류수업에는 당연히 주도수련(酒道修鍊)이 포함됐는데 사부님은 첫째 잔, 둘째 잔, 셋째 잔까지의 술을 가급적 천천히 마실 것을 당부하셨고 이유는 그래야만 오랜 시간 음주를 해도 급하게 취하지 않고 즐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갈비를 뜯고 나선 배를 완전히 채우지 않고 근처에 있는 ‘을지면옥’으로 단호하게 자리를 옮겼다. 갈비 뒤엔 물냉면이 제격이고 그중 을지면옥 육수 맛이 최고라는 믿음에 사부님은 반드시 을지면옥 물냉면만 고집하셨다. 면을 먹기 전에 의식을 치르듯이 두 손으로 그릇을 받치고 경건한 자세로 우선 육수부터 두어 모금 꿀꺽꿀꺽 삼킨다. 아, 그 맛이란, 뭐라 표현키 어려운 참으로 오묘한 맛. 갈비 먹은 뒤의 느끼한 입맛을 단숨에 가시게 하는 시원한 맛이다.
을지로 냉면 | 한지에 수묵채색 | 2012作
냉면 좋아하는 이들은 서로 자기가 가는 단골 냉면집이 낫다며 자존심을 걸고 핏대 올리며 본인의 단골집을 옹호한다. 평양냉면이란 게 사실 묘한 맛이라서 처음 먹어본 이들은 그 진수를 알아채기 어렵다. 그저 밍밍하다고 할 것이고 이 심심한 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의아해하기 일쑤다. 어쨌든 우리에겐 그렇게 조선옥 양념갈비와 을지면옥 물냉면과의 환상적 궁합을 몇 년간 즐겼던 맛있는 기억이 있다. 그뿐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단골집 ‘부민옥’과 김대중 대통령의 단골집 ‘양미옥’ 역시 우리들의 단골집이었다. 부민옥 양무침을 안주 삼아 술도 꽤나 마셨다. 또 빠트릴 수 없는 식당이 을지로의 최고참 ‘용금옥’인데, 이곳은 80세나 된 최고령의 서울식 추탕집이다. 롯데호텔 건너 을지로 입구 다동의 뒷골목에 있는 용금옥은 80년 세월을 찌그러진 낡은 한옥에서 겨우 버티고 서 있다. 추탕은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아는 맛이다. 애들은 그 맛을 모른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 때마다 추탕 맛의 묘미를 알게 된다. 골뱅이 골목 ‘영락골뱅이’의 자학하며 먹는 매운맛을 즐기기도 했다. 매워서 얼얼해진 입안을 맥주로 부시며 한량수업을 성실히 이행했다. 지금 사부님은 건강 때문에 화류계에서 은퇴하셨다. 그래서 주로 나 혼자 을지면옥에 들러 쓸쓸히 돼지고기 편육 반 접시와 물냉면을 시켜놓고 소주를 홀짝거리며 그때를 회상한다. 캬, 소주가 쓰면서 달다. 좋았던 그 시절, 맛있던 추억이 그립다.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그때 그 모습들이 아른거린다.
무지개 핀 휘황찬란한 꽃동산, 명동
그 시절 명동 | 한지에 수묵채색 | 2012作
1960년대 서울선 웬만큼 사는 집에는 가정부가 있었다. 식모라고 불렀다. 우리 집에도 식모 누나가 있었다. 순덕이 누나였다. 코가 크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았다. 순덕이 누나에겐 한 달에 한 번 외출이 허락됐는데 그날이면 누난 꼭 명동에 갔다. 있는 대로 멋을 냈고 때론 고모들 옷을 빌려 입고 나가기도 했다. 돈이 없으니 뭘 사는 건 아니었다. 그냥 하루 종일 명동의 의상실 쇼윈도에 걸린 옷들을 보거나 백화점을 쏘다니다 돌아왔다. 명동은 서울의 서울이었다. 모든 유행은 명동에서 탄생했다. 1960년대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명동과 그 주변 말고는 갈 만한 번화가가 거의 없었다. 종로의 화신백화점이나 신신백화점 근방이나 갈까. 식모살이로 갖은 고생을 해도 휘황찬란한 명동을 한 달에 한 번 본다는 것만으로도 누나는 충분한 보상을 받는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명동은 서울의 모든 식모 누나들에게 무지개 핀 꽃동산이었다.
노는 것만 생각하고 놀던 어린 시절, 망우리
동대문구 망우리 | 한지에 수묵채색 | 2012作
동대문구 끝인 망우리로 이사했다. 1975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망우리 공동묘지가 있는 고개를 넘어가면 그곳부턴 경기도. 49번 안성여객 종점이 망우리였다. 차고지에선 아침마다 출근하는 어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로 몇 십 미터씩 줄을 서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큰길 한가운데서 잡종개 암수 두 마리가 서로 딱 붙어버렸다. 반대 방향을 보며 접붙어 한 몸이 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해괴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에구머니나, 망측해도 유분수지! 민망스러워 못 보겠다만 달리 눈길을 둘 곳이 없었다.‘허참!’ 하며 남자들은 혀를 끌끌 차거나 키득거리고 여학생들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데 개들이 그렇게 철썩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흐뭇한 표정으로 슬슬 돌아다닌다는 게 신기했다. 한참 후 동네 욕쟁이 할머니가 뜨거운 물을 대야에 떠와 욕을 쏟아부으며 개들에게 확 뿌리니깐 ‘깨갱’ 비명을 지르며 그때서야 떨어졌다. “육시랄 놈의 개새끼들이 식전부터 개지랄들이야.” 할머니의 육두문자가 참으로 게걸스러웠다. 대단한 광경이었다.
☞ 1960년생인 사석원은 올빼미, 당나귀 같은 동물부터 산중 폭포 그림까지 현란한 원색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펼쳐내는 작가다. 물감을 두툼하게 바른 회화, 벽화, 입체 작품 등을 통해 역동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 뿐만 아니라 맛깔스러운 글솜씨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지면에 소개한 글과 그림은 <사석원의 서울연가>(샘터)에 담긴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지난 1월 출간과 더불어 소공동 롯데갤러리 본점에서는 책에 실린 원화 40여 점을 전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