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싸우던 임대·분양 '이웃사촌' 16년만에 화해

서울 강서구 방화 2동은 방화11사회종합복지관을 중심으로 11단지와 12단지가 나뉘어 있다. 1994년 단지가 조성될 때 11단지에는 영구임대아파트, 12단지에는 일반분양아파트가 들어섰다. 총 1016가구가 사는 11단지의 30%는 기초생활수급가정이다. 장애인·독거노인 가정도 절반 이상이다. 59~82㎡(18~25평)의 소형 아파트가 많은 12단지에는 신혼부부나 어린 자녀를 둔 부부가 많이 산다.

11·12단지 간 갈등은 입주 때부터 시작됐다. 11단지 주민들은 "애완견 키우는 12단지 주민들이 개똥을 제대로 안 치운다" "12단지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인사도 안 한다"고 했다. 12단지에서는 "11단지 장애인들이 전동휠체어를 함부로 몰고 다녀 보도블록이 깨진다" "11단지 사람들이 애들 지나다니는 길에서 술을 마신다" "우리는 분양받고 들어왔는데 왜 하필 임대아파트가 옆에 있느냐"고 불평했다. 마을 주민 김모(51)씨는 "서로 말도 안 섞고 학교에서도 같은 단지 애들끼리만 친하게 지냈다"고 말했다.

이런 방화2동 주민들이 3년 전부터 달라졌다. 18년째 위탁모로 아기를 돌보는 11단지 주민 김모(58)씨는 지난 30일 복지관에서 "아이고, 오늘도 좋은 장난감이랑 옷이 많네"라며 "유아·초등생을 키우는 12단지 엄마들이 쓸 만한 아기 옷이나 유모차를 기증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12단지 주민들은 "그새 아기가 많이 컸다"며 입양 갈 아이들을 안아줬다.

주민들을 화해시킨 건 2010년 생긴 주민 모임 '정가든'이다. '정이 가는 든든한 우리 마을'의 줄임말로, 가상의 마을 화폐를 만들어 재능·물품을 기부하는 현대판 품앗이 제도다. 2000원만 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고, 재능 기부는 반드시 해야 한다.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실명 대신 '미스코리아 할머니' '아기맘' '에너자이저' 등 애칭으로 부른다.

정가든은 당시 복지관에서 "주민 간 갈등이 심하니 서울시의 '물품 품앗이 사업'을 해보자"고 주민들에게 제안해 시작됐다. 처음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을 왜 하느냐" "복지관은 형편이 어려운 11단지 사람들만 이용하는 곳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복지관에서 11·12단지 간 통장들을 모아 수차례 간담회를 가지며 이견을 조율했다. 현재 11·12단지 2000여 가구 중 10%가량이 회원이 됐다.

주민들은 틈날 때마다 복지관에 들러 "뇌졸중이던 번개님이 중풍으로 입원했는데 이제 퇴원했대요" "당뇨 앓던 대자님이 어제 갑자기 돌아가셨다네요" 등 소식을 전한다. 복지관은 이런 소식을 모아 2주에 한 번 소식지를 낸다. 재능 기부도 수시로 진행된다. 12단지의 '젊은 엄마'들은 육아 경험이 풍부한 11단지 40~50대들에게 "잠깐 아이 좀 봐주실 수 있느냐"고 부탁하고, 11단지에 사는 장애인에게는 "휠체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라고 안부를 전한다.

정가든은 주민들의 삶도 바꿔놨다. 매일 술에 찌들어 '소주 아저씨'로 불리던 '샘골' 이모(57)씨는 정가든 활동을 한 후부터 술을 줄였다. 이씨는 지난해 초 "이웃들끼리 협동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며 2000원을 들고 왔다. 가입원서에 "힘을 잘 쓴다"고 썼다. 며칠 뒤 11단지에 사는 하반신마비 장애인 '곱단이' 선모(56)씨가 이씨에게 "가구를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창문이 틀어졌다" "전구를 갈아달라" 등 힘쓰는 일에는 이씨가 항상 출동했다. 주민들 사이에서 이씨는 인기인이 됐다.

정가든의 올해 사업은 '주민들의 경조사 챙기기'이다. 김소연 사회복지사는 "지금까지는 독거노인 등이 돌아가셔도 회원들에게 알리고 개별적으로 찾아갔다"며 "앞으로 고령사회에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아지는 만큼 정가든이 마을 주민들의 장례 등을 체계적으로 도울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