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바람 끌어온 선홍색 공장… 직공의 고단함을 다독이다

서울 성수동 일대는 인쇄·출판·기계 등 영세한 공장들이 줄지어 늘어선 '무채색' 지대다. 한 주민은 "잠시만 창문을 열어둬도 책상 위에 검은 먼지가 잔뜩 앉는 동네"라고 했다.

건축가 민현식(66·기오헌 대표·사진)은 이런 곳에 자신의 대표작이 있다고 했다. 사무기기 제조업체 신도리코 서울공장이다. 민현식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국건축가협회 명예회원을 지내며 국립국악중고등학교, 파주 평화누리, 파주출판도시 등을 설계했다. 최근 만난 그는 "신도리코는 '건축가로서 내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 건물"이라고 했다.

민현식의 작품은 성수역을 마주한 도로변 공장들 뒤편에 살포시 숨어있다. 그러나 건물은 한눈에 띈다. 햇빛에 감응하는 선홍색 신토석 벽돌로 마치 한 채의 낭만적인 교사(校舍)처럼 서 있기 때문이다. "보는 각도, 시간, 햇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빛나는 소재가 벽돌이에요. 사람의 손아귀에 잡히는, 가장 인간적인 자재이기도 하고요."

이 건물의 출발은 제조공장이었다. 1997년 준공된 두 개 동 중 한 동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사무기기 조립공장, 그리고 나머지 한 동은 완성품과 조립자재를 쌓아놓는 창고로 쓰였다. 공장이라면 효율성을 따져 획일적인 콘크리트 박스로 짓는 게 관행이었지만, 건축가는 이곳에 '비움의 철학'을 녹여놓았다. "건물 곳곳에 유리 통창을 냈어요. 공장에서 창고로 제품을 옮기는 통로의 사방은 유리로 마감했지요. 지하 1층 식당 옆엔 선큰(땅을 파서 만든 공간) 마당을 만들어 빛을 끌어들였죠."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옥상정원과 실내정원, 사내 갤러리 및 체육관, 휴게실은 민현식의 신도리코 공장이 이미 십수 년 전에 전범(典範)을 제공한 것이다. 건물 외벽에 식당으로 향하는 길고 좁은 철제계단을 달고, 지하 1층 식당에는 미술작품을 설치했다.

"공장을 설계할 때 내가 마음속에 두었던 생각은, 사실 건축적 얘기보단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있었어요. 일정한 조도(照度), 일정한 온도, 일정한 습도 안에서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며,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작업을 무한히 반복하는 그 사람들에게 내가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답은 하나였어요. 그들에게 잠시나마 햇빛의 아름다움을 선사하자. 지금이 봄이구나, 지금은 춥구나…. 이런 기초적인 자연의 감동을 느낄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죠."

이 같은 시도는 성공적으로 평가돼 건축주인 신도리코 측은 건축가에게 공장 설계를 계속 맡겼고, 민현식은 2000년 아산공장, 2002년 중국 칭다오 1·2기 공장 등 이른바 '신도리코 연작(連作)'을 낳는다.

주요 생산기지가 충남 아산과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서울공장은 현재 사무직원들이 일하는 본사가 됐다. 지난해 공장을 사무공간으로 바꾸는 리모델링을 진행한 건축가는 선홍색 벽돌 외벽은 그대로 두었다. "한 노동자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는데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공장에 대해 민 선생 당신이 쓴 글을 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어느 저녁, 좀 화나는 일이 있어 술을 잔뜩 먹고 공장을 나섰는데, 그때 석양에 비친 공장의 이 벽돌들이 그렇게 황홀하게 빛날 수가 없었다. 정말 행복했고, 그때 알았다. 뭔진 모르지만 당신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