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현실… 나는 차라리 도마뱀으로 살고 싶다

'나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사라지기로 했다. 여기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라면 사라지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정소현 단편 '양장 제본서 전기'(소설집 '실수하는 인간' 수록작)의 주인공 '영지'는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1983년 신문을 뒤적인다. 신생아 유기 사건을 다룬 기사를 찾기 위해서다. 그녀의 부모는 영지가 중학교 입학 무렵 이혼했다. 그 후 엄마는 1983년 어느 날 공중변소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갓난아기를 데려와 길렀는데 그게 바로 영지였다는 충격적 얘기를 들려준다. 어렵게 찾아가 만난 아빠 또한 자기 딸이 아닌 건 확실하다고 선을 긋는다. 자신의 기원을 알 수 없게 된 영지는 정부가 주관하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사라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 서비스'를 신청, 자신을 붉은 벨벳 표지로 양장 제본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버린다. '영지'라는 이름만 남긴 채.

◇소설 속 사람, 사물이 되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자신의 뿌리를 상실하거나 존재 자체가 파탄 나면서 탈인간화·사물화하는 서사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엔 인물이 몸담고 사는 가정과 사회가 흔들리는 데서 오는 불안과 갈등을 주로 다뤘다면 이제는 인물이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날 방편으로 몸의 일부 또는 전체를 제3의 생명체로 바꾸는 '변신'을 택한다"는 것이다.

'양장…'에서 영지의 엄마는 남편에게 버려진 충격으로 집에만 붙어 있다가 집이 되어버린다. 김언수 장편 '캐비닛'에서 한 사내는 별난 캐비닛을 발견하는데, 그 안엔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거나 휘발유나 종이를 먹거나 혀가 도마뱀이 된 사회 부적응자가 가득 들어 있다. 박민규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는 육식성 세상을 피해 초식성의 기린으로 변한 아버지가 등장하고, 또 다른 단편 '카스테라'에서 '나'가 물건처럼 냉장고에 넣어버린 아버지와 미국은 그 안에서 따뜻한 카스테라로 재탄생한다. 박진규의 단편 '교양 없는 밤'은 한발 더 나아간다. 정신만 있을 뿐 육체가 없는 '나'와 아내는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하며 타인의 체액을 흡입한다. 그들이 먹는 체액에는 타인의 '경험과 생각과 몽상이' 녹아 있다.

◇자기 존재를 기록하기 위한 노력

인간이 책이나 기린으로 변하는 '탈인간화'는 소설과는 친근한 주제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변신'이 대표적. 출장 영업사원 그레고르는 갑충(甲蟲)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현실이 그를 '벌레'로 만들었다는 해석, 그의 현실 탈출 충동이 '벌레'로의 변신을 이끌어냈다는 해석 등이 대종을 이룬다. 이후 '존재의 변신'은 소설로, 영화로도 수없이 활용됐다.

문학평론가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는 "이전의 상상력이 변신 후 죽거나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결말로 끝났다면 지금 주목해야 할 변화는 소설 속 인물들이 제3의 존재가 되어서라도 이 세상에 남아 있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을 비관해 인간이길 포기한 인물들이면서도 영원한 소멸은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양장…'의 영지는 책이 되는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도 책이 된 자신이 4년간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을 거라는 사실에 안심한다. '교양…'에서 '나'와 아내는 체액 속 타인의 기억을 자신의 경험인 양 반복해서 들여다보고 재생시킨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인정과 기억에 목매는 연약한 존재들. 김미현 교수는 "그래도 그건 절망이 아니다. 미치도록 존재하고 싶은 욕망의 변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