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빈세 딜레마

"선진국의 양적 완화 정책은 전례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미국과 일본이 자기들의 숙제를 하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 숙제를 해야 합니다."

지난달 30일, 금융연구원 주최로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해외자본 유출입 세미나에서 최종구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말했다. 그리고 외환거래세와 채권거래세를 도입할 때 실효성과 문제점을 설명해 나갔다. 장내가 술렁였다. '토빈세(용어설명)'라는 말은 직접 하지 않았지만, 그의 발언은 '한국형 토빈세'의 도입을 공론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책 당국자가 공식석상에서 토빈세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양적 완화에 급부상한 토빈세

정부는 그동안 토빈세의 '토'자만 나와도 펄쩍 뛰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작년 11월 "토빈세는 전 세계가 동시에 도입하자고 합의를 봤을 때 비로소 도입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불과 3개월 만에 외환 당국이 입장을 바꾼 것은 경쟁적으로 양적 완화(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해 돈을 푸는 것)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선진 국들, 그중에서도 작년 12월 엔고(円高) 탈출을 위해 돈을 무제한 찍어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나선 일본의 영향이 컸다.

이렇게 되면 고삐 풀린 말처럼 풀린 세계의 핫머니(단기성 외국 투자자금)가 한국으로 몰려올 수 있고, 또 나중에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토빈세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이전에 유입됐던 외국인 투자자금이 갑자기 유출되는 바람에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환율이 급등했었다.

◇외환거래세는 형평성 논란 우려

현재 외환 당국이 구상하는 '한국형 토빈세'는 외환거래세와 채권거래세 두 가지인데, 지금은 채권거래세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당초 정부는 외환거래세 도입에 더 무게를 두었다.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할 목적으로 원화를 바꾸는 외국인에게만 세금을 매기는 세금인데, 이렇게 하면 해외 핫머니에 대한 '정교한 타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환거래세는 내국인과 외국인 투자자를 차별해 국제 규약을 어길 수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본자유화 규약은 법에 내외국인을 차별하는 규정을 두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브라질은 이 원칙을 무시하고 외국인에게만 외환거래세를 부과했다가 선진국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외국인 투자자에만 세금을 부과하면 형평성 논란이 불가피하고, 외국인 자금 이탈을 가속화시킬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에선 채권 거래세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내외국인 투자자를 구별하지 않고, 채권 거래에 대해 세금을 물린다는 것이다. 유럽연합 11개국이 비슷한 형태의 금융거래세를 추진 중이라 외교적으로 부담이 적다.

그러나 채권거래세가 도입되면 국내 투자자가 뜻밖의 날벼락을 맞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주식 거래에는 거래금액의 0.3~0.5% 수준의 증권거래세를 매기지만, 채권 거래에는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채권 보유자가 이자소득을 거둘 때 소득세를 물릴 뿐이다. 채권거래세가 도입되면 채권 거래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

JP모간 코리아는 이번 공청회에서 "정부가 0.5%의 채권거래세를 부과할 경우 채권 거래가 50%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0.5%는 토빈세 논의가 시작될 때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기준세율이다.

정부는 이보다는 훨씬 낮은 0.01~0.1% 수준의 거래세 도입 카드를 검토 중이지만, 최근 3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이 연 3%에도 못 미치는 점을 감안할 때 투자자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정부가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을 확대하고, 즉시연금 비과세 대상을 축소하는 등 자본시장 과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채권거래세까지 물리면 조세 저항이 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문제가 있어 금융 당국도 신중한 반응이다. 금융 당국 고위 관계자는 "토빈세 도입은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고 시장 참여자들의 의견도 수렴해야 하므로 외환 당국 혼자 결정할 수 없다. 당장 도입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단서를 달았다. 중장기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토빈세

국제 투기 자본(핫머니)을 규제하기 위해 외환 거래에 부과하는 세금을 말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토빈(Tobin)이 1972년 제안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도입된 사례는 드물다. 스웨덴이 1984년 외국 투자자가 주식과 채권을 살 때 거래세를 부과했다가 자국 금융시장이 위축돼 1991년 12월 이를 철회했다. 2001년에는 프랑스, 2004년에는 벨기에가 비슷한 거래세를 도입하려고 국내 입법 절차를 마쳤지만, 유럽 다른 나라들과 보조를 맞춘다며 시행은 미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