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바다에 사랑을 싣고 세계의 女心 훔치다

그는 바다에서 인생을 배웠다. 인천중 1학년부터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고3 때만 빼고 매해 어선에 몸을 실었다. 짧게 4주, 길게는 7주간 남지나해·동지나해와 서해의 여러 섬을 누볐지만 연평도에서 열린 파시(波市)를 그는 잊지 못한다.

"은빛 파도와 바람에 나부끼는 만선(滿船)의 깃발, 그 배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어부들의 얼굴엔 도시인들이 갖지 못한 해맑고 순박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땀 흘려 노동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인격으로 만들어진 웃음을 저는 지금도 배우려 해요."

박은관(朴殷寬·58) 시몬느 회장은 세계 명품 핸드백 시장의 최강자다. 작년 5억3000만달러, 올해 6억달러 수출을 목표로 하는 이 회사의 고객 리스트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도나카란뉴욕(DKNY)·마이클코어스·버버리·코치·파실·케이트스페이드 브랜드가 붙은 제품들이 그가 만든 것들이다.

그의 성공 스토리를 이해하려면 선친(先親)이 세운 '황해수산'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황해수산은 원양어선단, 조선소, 냉동공장, 객주(客主)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 남아 있다면 사조산업이나 오양수산보다 더 큰 종합 해운 재벌이 됐을 것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네 아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딱 3년만 직장생활을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린 뒤 대학 학과 사무실에 있는 입사서류를 하나 뽑았는데 그게 청산(靑山)이라는 패션회사였다. 면접장에서 이 젊은이는 선언했다.

"이 일은 3년밖에 못합니다. 넥타이 안 매도 되겠지요? 담배도 마음껏 피워야겠습니다!" 그를 보고 정홍덕 회장이 한참 껄껄대더니 물었다. "거 재미있는 녀석이네. 근데 너 박 회장 아들 아니냐?" 정 회장은 젊을 때 여섯 달 동안 황해수산 배를 탔다고 했다.

아버지는 "왜 내 아들이 여자 핸드백을 만들고 다니느냐"고 한탄했지만 박은관은 청산의 모든 승진(昇進) 기록을 깨고 있었다. '리즈 클레이본'과 거래를 터 첫해 수출 600만달러를 기록하더니 1800만→3000만→5000만→8000만달러로 수직 상승한 것이다.

그는 사업가 팔자(八字)를 타고난 것일까. "1979년 12월 입사해 다음 해 3월 이탈리아로 첫 출장을 갔습니다. 너무 쇼크를 받았어요. 베네통이라는 브랜드를 처음 봤는데 남자 바지 색깔이 글쎄 '빨주노초파남보'라니…. 바지와 티셔츠를 잔뜩 사왔지요."

그는 비즈니스관(觀)이 확고하다. "전자·자동차·조선이 200~300호짜리 대작(大作)이라면 패션·핸드백은 10~20호짜리 소품(小品)이죠. 대신 내 맘대로 그릴 수 있잖아요. 내가 디자인한 핸드백을 6개월 후 뉴욕에서 누군가 들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3년 목표였던 직장생활이 8년째로 접어들 무렵 사건이 터졌다. '에스프리'라는 브랜드를 새 고객으로 끌어들이려 하자 '리즈 클레이본'에서 "양다리 걸치면 주문을 줄이겠다"고 협박해온 것이다. 엉뚱하게 그 고민은 박은관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에스프리에서 '직접 회사를 차리라'고 권유해온 겁니다. 정 회장도 쾌히 수락해주시더군요." 1987년 6월 28일 영등포구 대림동에 '시몬느'를 세웠을 때 모두가 '제조업의 사양(斜陽) 시대'를 말했지만 박은관은 오히려 고가(高價)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상을 단숨에 허물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최고급 소재를 구한 뒤 국내 최고의 장인(匠人)들이 만든 핸드백 10여개를 들고 DKNY 본사로 찾아갔죠. 구매 담당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군요. 품질은 같은데 가격은 40%나 저렴했으니까요."

다음 날 그들은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고객이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를 보면 주저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박은관은 항변했다. "향후 핸드백 시장이 급성장할 텐데, 그때도 이태리에 의존할 테냐. 이태리의 수준도 처음엔 별로였지 않은가?"

이렇게 설득해서 받아온 물량이 120개였다. 그게 1년 만에 DKNY의 60%로 치솟자 폴로랄프로렌·캘빈클라인 같은 기업들이 먼저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후 시몬느는 단순 하도급 수준인 OEM에서 벗어나 기획·소재 개발·공급에 이르는 ODM 업체로 입지를 굳혔다.

'바다'가 삶을 가르쳤다면 그의 나침반은 사랑이다. 회사를 만들 때 선친은 돈 들여 '장풍(長豊)' '대성(大星)' 같은 회사명을 지어왔는데 박은관이 택한 것은 그의 아내 오인실의 별명인 '시몬느'였다. 시몬느는 시어(詩語)로 '이상형' '당신'이란 뜻이다.

11년간 사귄 둘 사이엔 믿기 힘든 사연이 있다. 헤어져 기별도 없던 1984년 9월 13일 밤, 그는 연인과 재회하는 꿈을 꾼다. 다음 날 회사에서 '땡땡이'쳐 추억 서린 경복궁 옆 카페 '준'에 들렀더니 역시 같은 꿈을 꿨다는 오인실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날을 기념해 '0914'라는 자체 브랜드를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2015년쯤 서울 도산공원 앞 에르메스와 폴로 매장 사이에 플래그십 스토어도 낼 겁니다. 지금도 불같은 사랑을 하느냐고요? 그때만큼 짜릿하진 않지만 뿌리와 믿음은 더 강해졌죠, 사랑이 으레 그렇듯이…."

* 사족(蛇足)―박은관은 아버지를 못 잊어 최근까지 전복 양식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정리한 뒤엔 0914 제품에 물고기 문양을 집어넣고 있다. 어찌 보면 기독교의 상징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