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아내가 자랑스러워 붓을 든 남편

성인(聖人), 위인(偉人), 창녀, 왕실이나 귀족 여인…. 옛날 서양 화가들은 주로 이런 여자들만 그렸다. 19세기 말 등장한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이 비로소 '일상의 여자'를 캔버스에 끌어들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현실 속의 사람'이었기 때문. 미국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인상주의 특별전-빛과 색의 아름다움을 넘어'에선 19세기 말 미국 여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남색 모자를 쓰고, 목깃과 치맛단에 남색 털을 댄 연갈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탁자에 기대놓은 캔버스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여자의 직업은 화가. 그녀는 지금 자기 그림 제목을 고심하고 있는 중이다. 여성 초상화로 유명한 프레더릭 워런 프리어(Freer·1849~1908)가 그린 이 작품 제목은 '제목 정하기'(1882). 작품 속 여성은 작가의 아내다. 가정주부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아내를 그린 건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에게선 드문 일. 이 그림에 대해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는 "화가인 아내를 남편이 그렸다는 건 아내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거나 최소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젊은 부부가 은행을 찾았다. 꼬박꼬박 예금한 돈을 은행에 맡기곤 통장에 적힌 금액을 보며 흐뭇해한다. 프릴이 가득 달린 분홍 모자를 쓰고, 분홍 드레스를 입은 젊은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애버트 풀러 그레이브스(Graves·1859~1936)의 '종잣돈'(1910) 속 장면. 우정아 교수는 "프랑스 인상주의 그림 중 아내와 남편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여성인권운동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시작됐지만, 당시 부부 관계에선 미국 여성들이 프랑스 여성들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경제권을 가지고 가정을 일궜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했다.

역시나 여성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 로톤 S. 파커(Parker·1868~1954)의 '첫 아이'(연도 미상)는 초여름 정원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어머니를 그렸다.

전시에는 이 밖에 루이스 리츠먼(Ritman·1889~1963)의 '정원에서 바느질하는 여인'(1915년경), 장 보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캐서린 E.체리(Cherry·1880~1931)의 '세인트루이스 유니언 시장'(연도 미상) 등도 소개됐다. 전시는 3월 29일까지. 관람료 성인 1만2000원, 중·고생 8000원, 초등생 5000원, 유아 4000원. (02) 501-6976 www.americanimpressionis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