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에 불사른 세계 갈등

어둠 속에서 돌연 화사한 영상이 떠오른다. 사방이 온통 꽃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공간. 자세히 보니 꽃으로 위장한 무장 군인들이 화면 안에서 천천히 행군하고 있다. 순간 지저귀던 새소리가 사라진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용백의 작품 '엔젤 솔저'(23분·2011) 앞에서 관람객은 낯선 경이로움에 휩싸인다.

미국의 MIT 미디어랩, 일본의 ICC와 더불어 세계 3대 미디어 아트 센터로 손꼽히는 독일 칼스루에(Carlsruhe) ZKM이 지난 9일(현지시각) 아시아의 비디오 아트를 통째로 보여주는 '무브 온 아시아: 아시아의 비디오 아트 2002―2012'를 개막했다. 대안공간 루프(디렉터 서진석)가 중국·홍콩·인도·인도네시아·일본·파키스탄·필리핀·싱가포르·스리랑카·대만·태국·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큐레이터들과 협업해 총 140여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장 내 작품 설치는 ZKM이 주도했다.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박찬경의 '플라잉'(12분 4초·2005), 한국 사회의 이념 논쟁을 다룬 김홍석의 단편영화 '와일드 코리아'(16분·2005) 등을 전시장 전면에 배치했다. 대개 전쟁·분쟁의 상흔, 갈등과 붕괴, 치유와 회복을 다룬 작품. "작품 배치를 보면 서양인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미·소 냉전은 끝났지만 유럽과 비유럽 사이의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서진석 디렉터의 말이다.

중국 설치미술·행위예술가인 송동은 참치 여러 토막을 중국 전통 산수화처럼 배열하고 이를 젓가락 쥔 손이 먹어치우는 과정을 찍은 영상 작품 '산수(山水) 먹어치우기'(7분 7초·2005)를 내놓았는데, 중국의 환경 파괴를 은유적으로 꼬집는다. 일본 작가 고이즈미 메이로의 '마이 보이스 우드 리치 유'(16분 45초·2009 )는 관람객의 호응도가 가장 높은 작품. 엉뚱한 데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청년의 이야기에 독일 관람객들은 처음엔 웃었다가 나중엔 훌쩍이며 자리를 떴다.

올해는 1963년 백남준이 독일에서 개인전을 통해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지 50년 되는 해. ZKM은 왜 지금 아시아 비디오 아트를 주목하는가. 베른하르트 제렉세(Serexhe) ZKM 수석 큐레이터는 "현대 사회는 역동과 갈등, 충돌과 타협으로 돌고 돌지만 미국과 특히 서유럽은 조용하다"며 "반면 여전히 갈등, 변동, 도전이 넘치는 아시아는 비디오 아트가 무한 발전하기에 최적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8월 4일까지 177일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