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 교수의 경영수필] 삼성의 혁신적 오디오 제품이 안 팔린 이유는?

1980년대 초반, 삼성전자의 오디오 판매 기획을 담당하던 때의 일이다. '소노라마'라는 하이파이(원음에 가까운 음으로 재생하는 장치) 오디오 브랜드가 잘 팔려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연이은 정치적 불안과 2차 오일쇼크로 내수 시장에 극심한 불황이 닥쳤다.

결국은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만들 수 있는 수출품은 다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경쟁사 주력 브랜드를 모방한 카세트 라디오 같은 '미투(me-too) 제품'밖에는 수출해 팔 제품이 없었다. 그랬기에 당시에 채널당 185와트의 앰프를 개발한 건 큰 뉴스였다. 세계 최고 출력의 제품을 만들 정도로 선진 기술을 확보했다는 자긍심이 대단했고, 그만큼 회사의 기대도 높았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샘플을 여기저기 보냈지만, 단 한 대도 팔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설계실의 엔지니어 입장에선 이 세상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일생일대의 경험이고 영광이었겠지만, 고객의 입장은 달랐다. 가정용 오디오로 그렇게 높은 출력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초(超) 고출력의 오디오를 원하는 오디오 마니아가 있다손 치더라도, 오디오 업계에 무명에 가까운 회사의 제품을 누가 사려 하겠는가.

◇내가 만들고 싶은 제품인가, 고객이 원하는 제품인가

많은 기업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고객이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우(愚)를 범하곤 한다. 설사 세상에 없는 것,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든다 하더라도, 반드시 고객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껏 없었던 색다른 소재의 휴대전화를 만든다고 해보자. 그리고 보통의 휴대전화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100이고, 새로운 소재의 휴대전화를 만드는 데는 150이 든다고 가정하자. 아무리 최첨단 소재의 휴대전화라도 소비자가 추가로 50을 기꺼이 지불할 가치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다.

창조성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고객이 원하지 않는 창조는 연구실의 프로토타입(prototypeㆍ시험용 제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사업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유능한 개발자는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창조 본능을, 소비자의 니즈를 찾으려는 아웃사이드인(outside-in)의 관점과 잘 조화시키는 사람이다.

또한 성과를 내는 경영자는 개발과 디자인 부문의 창조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업성 역시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람이다. 성공적 제품 개발과 사업 추진에는 이처럼 창조성과 사업성을 잘 조화시키는 '시장 중심적(market driven) 사고'가 필요하다.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뿐이다."

물론 고객이 생각하지 못하는 혁신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고객과 시장 자체를 새로 창출해 내는 '시장 주도적(market driving)' 기업들이다.

포터블(휴대용)TV를 가장 먼저 판매한 회사는 소니였다. 하지만 먼저 개발한 회사는 따로 있었다. 바로 GE였다. GE는 포터블TV를 개발한 뒤 대대적인 시장조사를 했는데, 대부분 소비자가 포터블TV의 필요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좋은 제품이기는 하지만, 당장 필요한지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GE는 포터블TV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출시를 미뤘다.

그런데 몇 개월 후 소니가 포터블TV를 시장에 내놓았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당시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Morita Akio) 회장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뿐이다(Markets do not exist, they are created)." GE가 나름대로 '아웃사이드인'의 관점에서 '시장 중심적 사고'로 판단해 출시를 미뤘다면, 소니는 '시장 주도적 사고'로 출시를 감행해 성공을 거뒀다.

요즘은 다소 고전하고 있지만, 과거 소니가 전자업계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신제품이 신시장을 창출한다'는 모리타 회장의 비전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런 비전을 바탕으로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 신제품 아이디어를 내기 위한 내부 경쟁, 자사의 기존 제품 시장에 대한 악영향을 감내하는 지속적인 제품 혁신이 뒤따랐다.

◇"성공은 위험한 것"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성공한 시장 주도적 기업도 지속적인 혁신에 실패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관료화, 자만심, 위험 회피적인 문화가 자리 잡기 때문이다.

창업 초기 기업가 정신이 충만할 때와는 달리 웬만큼 성장한 후에는 경영이 보수화하기 쉽다. 그럼에도 혁신을 계속할 여지와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최근 소니의 실적이 부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10여년 동안 과거의 성장에 안주하여 혁신에 실패한 결과, 시장을 주도하는 신제품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피카소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성공은 위험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스스로의 성공 비결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자기 모방은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더 이상의 혁신이 없는) 자기 모방은 고인 물처럼 조직을 썩게 하기 마련이다."

스티브 잡스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초심을 잃지 말자. "Stay hungry(끝없이 갈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