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히어로&히로인] [47] 아버지들의 슬픔은 대체로 무뚝뚝하다

아들은 아버지를 먹고 자란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는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가난한 소년의 성장기이자 성공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의 꿈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보통 아버지'의 무뚝뚝한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년 남자 재키 엘리어트(게리 루이스)에게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 하나는 광부다. 광산촌에서 태어났으니 다양한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의 일터는 대규모 파업 중이다. 회사와 노동자, 파업에 가담하는 광부들과 파업을 철회하는 광부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기만 하다. 파업이 장기화되니 경제적으로도 쪼들린다.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품인 피아노를 쪼개서 땔감으로 써야 할 정도다. 조업을 재개한 동료를 향해 욕설을 퍼부어대는 재키의 모습은 그런 불안함과 막막함을 대변한다.

재키의 또 다른 정체성은 아버지다. 아내가 일찍 죽은 집에는 스무 살 큰아들과 열한 살 작은아들이 있다. 아버지는 비쩍 마르고 수줍음 많은 성격의 빌리(제이미 벨)를 늘 귀엽고 안쓰러운 막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 녀석에게 지독한 꿈이 있는 줄은 몰랐다. 빌리는 발레로 살고 발레로 걷고 발레로 꿈꾸는 소년이다. 발레라니. 아버지는 불안하다. 모든 게 다 새까맣고 누추한 광산 마을에서 그런 허황한 꿈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버지는 잘 안다. 언젠가 남들처럼 평범한 광부로 살게 되었을 때 아들은 현실과 꿈 사이의 엄청난 낙차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착한 아버지는 자식에게 진다. 아니 져 준다. 재키가 마음을 바꿔 먹는 이유는 '천재일지도 모르는' 아들의 뛰어난 발레 재능에 압도당해서만은 아니다. 아들이 품은 그 간절한 희망을 지켜주고 싶고, 아들의 앞날에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열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재키는 빌리의 오디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토록 경멸하던 파업 철회자의 버스에 올라탄다. 배신자라는 경멸과 계란 세례 앞에서 그저 묵묵하다. 그가 견딜 수 있는 건 아들 때문이다. 빛 하나 없는 지하 갱도로 빨려 들어가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어땠는지 아들이 보지 못해서 어쩌면 슬프고 어쩌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