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실컷 울었지… '시네마 천국'에서

엄마가 월부 책 장수에게서 사주신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 전집이 슬슬 지겨워질 때쯤 나는 극장으로 돌았다. '십오 소년 표류기'의 '고오든'이 개폼을 잡아봐야 소년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을 즈음이었다. 나는 더 큰 세상을 활동사진으로 보고 싶었다.

구멍가게에서 십원을 주면 은좌극장이나 신양극장의 초대권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반들반들한 비닐 의자는 '담배빵'이 숭숭 나서 용수철이 보였고, 간혹 통로 사이로 쥐들이 달음박질을 했다. 그러건 말건 나훈아가 애인을 괴롭히는 적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리는 장면에 박수를 쳤다. 그때 35밀리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돌고 돌아 변두리까지 오면 비가 죽죽 내렸다. 그뿐이랴. 영사실 알프레도가 딴 짓을 하면 한 삼십분쯤은 먹통 같은 스크린을 쳐다보며 야유를 날렸다. 팝콘은 무엇인지 몰랐고, 오징어와 땅콩이 절묘한 궁합이란 걸 처음 안 것도 극장이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신문 팔던 친구 용삼이와 우미관 옥상의 허술한 철사 자물쇠를 따고, 교복 차림으로 김추련 영화에 잠입했다. 롱샷으로 잡은 원미경의 올 누드 자태에 숨이 컥컥 막히던 때이기도 했다(누님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경비아저씨에게 잡혀 불 꺼진 극장 현관에서 두들겨 맞기도 했다. "이 녀석들, 흥행에 빠지면 인생 조진다, 엉?"

영화 보는 일이 '흥행'이라는 묘한 논리였을 텐데, 아마도 그 아저씨도 영화에 반해 극장 밥을 먹고산다는 자조가 아니었나 싶다. 참, 그렇게 혼이 나고 뒷문으로 돌아 나오면, 저만치 '차기 상영작'의 화려한 간판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정윤희 누나의 커다란 눈망울이 보였던 것도 같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서대문으로 진출해서 '테멘극장'의 반값 할인 클래식을 감상했다. 앤서니 퀸을 구원할 수 없었던 '25시'의 세상은 나를 염세적 분위기에 빠뜨렸고, 그때 나는 이미 세상을 비웃느라 대학 입시 같은 건 남의 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70밀리도 아닌 작은 화면이었지만 '벤허'의 전차 바퀴는 실감 나게 굴렀고, '십계'의 홍해도 제법 장중하게 쩍쩍 갈라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왜 요리사가 되었느냐고 묻는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탈리아 요리냐고. 별난 요리를 하던 사람이 거의 없던 90년대에 나의 선택은 희한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대부' 때문이라고 종종 말한다. 시칠리아의 거친 들판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 그리고 거기 겹쳐지는 이미지는 '시네마 천국'이었다. 토토와 알프레도의 우정, 그리고 시네마키드였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환상적인 고백으로 가득 찬 그 신비로운 영화 말이다. 아아,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지금도 귓가에 흐르고 실연당한 청년 토토가 쓸쓸히 골목을 걸어가던 그 장면을 어찌 잊겠는가. 젊은 날, 강의를 빼먹고 호암아트홀 조조로 '시네마 천국'을 보던 그때 나는 '운명적으로' 이탈리아에 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아마도 한국인 최초의 시칠리아 거주 요리사가 되었던 것도 갓 파더 말론 브랜도와 토토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쭙잖은 요리사가 되어 접시를 팔아먹으면서 나는 상처받고 외로웠다. 요리사는 천성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홀에서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요리를 즐길 때 요리사들은 온갖 소스를 옷자락에 묻힌 채 형광등 파리한 불빛 아래서 폐를 학대하는 고기 연기를 들이마신다. 격찬의 화려한 무대 옆, 컴컴한 어둠에 숨어 먼지투성이 커튼을 여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럴 때면 아무도 없는 영화관을 찾는다. 아트 필름은 여전히 관객의 외면을 받지만, 아무도 타이틀이 다 올라갈 때까지 일어서지 않는다. 얼른 관객을 내쫓기 위해 환하게 불을 켜는 망령된 극장 직원도 거기는 없다.

나는 8000원으로 짧은 시간 완벽한 안식을 얻는다. 크레페 가게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로제타가 죽기 위해 가스를 틀었을 때 나는 오열했고, 자전거 탄 소년 시릴의 뒷모습에 쏟아지던 베토벤 협주곡 5번은 그것으로 가장 완벽한 감정 정화의 순간이었다. 나는 울었고, 아무도 왜 우느냐고 묻지 않아 좋았다. 나이 오십이 다 된 사내가 울 수 있는 시공간이 서울 바닥에서 또 어디 있겠는가. 그것으로 나는 다시 불을 켜고, 음식을 만들고, 과자를 사 들고 집으로 갈 힘을 얻었으니.

☞박찬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잡지 기자를 하다 서른 넘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요리와 와인을 공부했다. 서울 강남의 스타 셰프로 이름을 알렸고, 최근에는 '글 쓰는 요리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시칠리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시절의 요절복통 에피소드를 담은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추억은 맛이다'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