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로폼을 없앴다… 포장 비용·시간도 줄어들었다

지난 15일 서울 논현동 삼성전자 전시장에 857L(리터)짜리 신형 냉장고가 도착했다. 냉장고를 배달하고 설치하는 과정은 이전과 달랐다.

냉장고·세탁기·TV 등 대형 가전제품은 스티로폼 재질의 충격흡수재로 감싸고 두꺼운 종이상자에 포장해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배송 기사들은 커다란 종이상자를 뜯고 스티로폼을 벗겨 낸 다음, 가전제품을 설치했다. 설치를 끝내고 나서 커다란 스티로폼과 종이상자를 갈무리해서 버리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이날 작업은 매우 간단했다.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만든 포장 상자를 간단하게 벗기고 냉장고를 내려놓은 다음, 빈 포장 상자를 접어 차에 싣는 것으로 끝이었다. 과거 10~20분씩 걸리던 작업이 2~3분 만에 끝난 것이다. 박형욱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개발팀 수석은 "포장 상자는 40번쯤 다시 쓸 수 있다"면서 "종이 사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나무를 연간 13만 그루 심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친환경 포장으로 비용 절감

친환경 포장 기술이 산업계 전반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재활용률을 높이면 환경을 지키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데다,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까지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대형 냉장고 포장을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 포장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종이 포장을 플라스틱으로 바꾸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친환경에 걸맞은 재료를 쓰면서 충격과 진동을 흡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연구진은 서울 청계천 공구상가부터 동대문 원단상가, 캠핑용품 상점 등을 돌며 적합한 소재(素材)를 물색했다. 다양한 가옥 구조에 적합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현장 배달 사원들도 개발에 참여시켰다. 이 회사는 현재 판매 중인 냉장고의 포장을 모두 친환경 포장으로 바꾸면, 비용을 100억원가량 절감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산화탄소 배출도 연간 7000t 줄일 수 있다. 삼성전자는 냉장고 외의 대형 가전제품에도 친환경 포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재활용률을 높이는 포장 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한국에이버리는 페트(PET)병에 붙어 있는 라벨이 잘 떨어지게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탄산음료·맥주·우유 등을 담는 페트병에는 브랜드와 제품명, 각종 정보가 적힌 스티커 라벨이 붙어 있다. 페트병을 재활용하려면 이 라벨을 떼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작업이 많았다. 또 라벨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으면 재활용한 병의 품질도 나빠지는 문제가 있었다.

한국에이버리가 개발한 스티커 라벨은 섭씨 85도의 뜨거운 물에 담가 놓기만 하면 접착력이 사라져 쉽게 떨어진다. 이 기술은 서울우유 페트병에 적용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 다양한 식품기업에서 공급 요청을 받고 있다.

코카콜라는 공학적인 구조 변경을 통해 500mL짜리 생수 페트병의 무게를 22% 가볍게 만들어냈다. 이 덕분에 이산화탄소 배출은 연간 1072t 줄일 수 있다. LG디스플레이는 LCD 포장을 줄이는 새로운 파우치를 개발했다. 이전에는 LCD를 포장할 때 표면이 긁히는 것을 막아주는 보호필름을 씌우고 충격을 완화해주는 파우치로 감쌌지만, 이 두 기능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선진국은 친환경 포장이 대세

2010년 기준 전 세계 포장 시장 규모는 6700억달러(약 724조원)로 추산된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는 포장 전문 대기업도 많다. 벨기에 SCA 패키징은 2009년 매출액이 150억달러(약 16조2000억원)에 달했다.

스웨덴 테트라팩과 일본 도요 세이칸, 캐나다 노벨리스 등은 포장 기술 하나로 각각 연 매출 10조원 이상을 올리는 기업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친환경 포장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도요 세이칸은 2009년 1억8300만달러(약 2000억원)를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테트라팩은 최근 세계 최초로 종이 팩 안쪽에 0.006㎜의 아주 얇은 알루미늄 막을 씌우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음식물의 보존 기간을 늘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장점이 있는 데다, 알루미늄 사용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국 환경 규제도 친환경 포장 산업을 키우고 있다. 네덜란드는 2008년부터 포장 소재에 따라 다른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플라스틱과 알루미늄 소재에는 높은 세금을 부과해 사용을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또 올해부터는 포장 업계가 기금을 조성해 지방자치단체의 재활용 활성화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최근에는 친환경 포장에 대한 국제 표준도 제정됐다. 지난해 6월 서울에서 열린 'ISO 국제 표준화 총회'에서 미국·독일·일본 등 각국 전문가들은 'ISO 친환경 포장 국제 표준'을 결정했다. 이 표준은 올 1월부터 시행 중이다. 친환경 포장에 대한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재활용률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등을 정의한 표준이다.

심진기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패키징기술센터장은 "친환경 포장은 환경을 지킨다는 측면도 있지만, 결국은 비용을 줄여 막대한 이익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