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高 날개 달고… 국내기업, 해외기업 쇼핑 나선다

유럽 최대 사모펀드 가운데 하나인 퍼미라(Permira)의 한국법인에는 요즘 대기업들 문의가 부쩍 늘었다. 해외 기업 인수·합병(M&A)과 관련해 면담 요청도 쏟아진다. 이수용 퍼미라 한국법인 대표는 "지난해까지는 직접 만나자는 요청이 거의 없었다"면서 "올 들어 현금 보유가 많은 대기업일수록 유럽 기업 M&A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국내 주요 기업이 새해 들어 해외 기업 M&A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세계 경기가 조금씩 회복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원화 강세와 저금리 기조로 국내 기업의 해외 기업 M&A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 국면… 해외 M&A로 돌파구 모색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실장은 "해외 M&A에 관심을 갖는 기업이 늘어나는 것은 국내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작업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필연적 수순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GS건설은 20일 올해 경영계획을 발표하면서 해외 기업 M&A를 주요 경영 목표로 내걸었다. 지난해 6월 인수한 스페인 수(水)처리 업체인 이니마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다.

원천 기술 확보에 대한 욕구도 해외 M&A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독보적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통째로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두산중공업과 삼성테크윈이 최근 이탈리아 에너지 업체 '안살도 에네르기아' 인수전에 나란히 뛰어든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회사는 복합 화력발전소에 들어가는 가스 터빈 분야의 원천 기술을 갖고 있다. 모(母)그룹이 자금 악화에 빠지면서 지난해부터 M&A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다.

새로운 해외시장 개척 차원에서 M&A를 노리기도 한다. KT는 모로코 최대 통신사 마록텔레콤 지분 인수를 추진 중이다. 국내에서 검증된 상품과 서비스를 바탕으로 해외에 진출해 정체 상태인 매출을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대한항공도 유럽 시장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다음 달 체코 국영 체코항공 지분 입찰에 참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원화 절상으로 조건 유리… 유럽 기업에 관심 많아져

국내 기업은 그동안 세계 M&A 시장에서 큰손이 아니었다. 연간 해외 M&A 금액은 일본이나 중국의 10분에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실탄이 부족했다. 해외 M&A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M&A에서 실패하는 사례 10개 가운데 8개는 더 높은 인수 가격을 적어내는 일본·중국 기업에 밀리기 때문"이라며 "중국 기업은 정부의 막강한 지원에 힘입어, 일본 기업은 수십년 동안 쌓아놓은 막대한 유보금을 바탕으로 인수에 나선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조금씩 상황이 바뀌고 있다. 국내 기업도 현금 보유액이 급증하는 데다가,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올랐기 때문이다. 국내 상장사가 그동안 기업 내부에 쌓아놓은 내부 유보금도 823조원에 달한다.

원화 가치는 지난해 5월 이후 미국 달러화(貨)에 비해 9% 이상 평가절상됐다. 해외 인수 비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게 된 셈이다. 전광우 국민연금 이사장은 "국내 기업 입장에선 해외 기업 인수에 점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도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엔화 강세를 바탕으로 해외 M&A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엔화 가치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2011년 일본 기업이 사들인 해외 기업은 건수로는 600건, 금액으로는 700억달러에 육박했다.

국내 기업은 최근 유럽 기업 인수에 부쩍 관심을 갖는 분위기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근근이 버티던 알짜 기업이 속속 매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