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채성진 기자의 探人探事] 파란만장 구청장님 환갑에 족보 家業 잇다

1954년 대전 동구 중동에 족보 간행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가 문을 열었다. 충북 제천에서 서점을 하다 6·25 전란 때 모든 것을 잃은 박홍구(2012년 2월 타계)가 서른한 살에 세운 '회상사(回想社)'다. 20평 남짓한 공장에 수동·반자동 인쇄기 2대. 그렇게 시작한 족보 출판업은 '뿌리 찾기 열풍'을 타고 성공을 거듭했다. 그동안 제작한 족보가 600여만권. 국내 족보의 80% 이상이 이곳에서 나왔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박홍구의 장남 박병호(67)는 '족보 출판의 원조(元祖)'로 불리던 아버지가 부담스러웠다. 청년 시절부터 부친의 뜻을 애써 외면했다. 약사·시의원·구청장을 지내며 가업과 동떨어진 길을 걸었다.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하고, 가계(家系)보다 소셜 네트워킹에 열광하는 시대. '족보의 황금기'가 저물고 있었다.

내리막길을 타고 있는 가업을 더이상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자손대대 이어달라"는 부친의 당부가 환갑을 맞은 박병호의 가슴을 쳤다. 2007년 회사 일을 맡았다. 창업보다 더 어려운 수성(守城)의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홍구가 타계한 지 1년. 박병호는 "사무실 야전침대에 누워서도 족보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친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59년 동안 축적한 방대한 씨족사(氏族史) 콘텐츠를 인쇄를 통해 지켜나가겠다"고 말했다.

◇"한국 족보 80%는 회상사에서 출판"

―돌아가신 아버지는 성균관 부관장, 고령 박씨(高靈朴氏) 대종회장을 지냈다. 어떤 분이었나.

"너그러웠지만 몸가짐과 예의범절에 엄격했다. 선친은 모든 일에 정성, 맡은 일에 최선, 목적 있는 행동, 후회 없는 생활 등 네 가지를 가훈으로 삼았다. 변화하는 세상에 창의적으로 적응하면서도 불변의 원칙은 반드시 지키라고 강조하셨다.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사훈(社訓)은 사랑·이성·창조다. '우리의 다짐'도 잊을 수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기술 혁신을 통해 예술 작품을 만든다. 개성은 강하되 표현은 부드럽게 한다는 것이다. 모자라는 내가 별 탈 없이 성장한 것은 이런 가르침 덕분이다."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창업 초창기 경험담을 자주 들려줬다던데.

"선친이 족보 주문을 받으러 겨울 새벽길을 달려갔을 때 얘기다. 문중 원로가 언제 잠에서 깰까 처마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침을 준비하던 그 집 며느리가 밖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쌀뜨물을 확 내다 버렸다.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선친은 고드름을 매달고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문중 원로가 미안한 마음에 주문을 맡겼다. 선친은 완벽한 족보를 만들어 화답하며 그렇게 맺은 인연을 평생 이어가셨다."

―'회상사'란 이름은 과거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1954년 12월 13일 지금 위치에 창업하며 지은 사명(社名)이다. 경험자(經驗者)는 과거를 회상하고, 지인(智人)은 미래를 연구하며, 우인(愚人)은 현재 만족에 여념이 없다. 조상들의 예지가 담긴 아름다운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옳게 인식해 힘차고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하자는 뜻이다. 얼마나 미래지향적인 이름인가."

―'족보 특수(特需)'로 큰 재미를 봤다.

"6·25 난리통에 모든 게 파괴됐다. 족보라고 제대로 남았겠나. 문중마다 흩어진 집안을 한데 모아야 했다. 뭐가 필요했겠나. 1970년대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종친(宗親)과 뿌리를 찾자는 운동이 시작됐다. 1980년대 중반에는 1950~60년대 만든 족보를 고쳐달라는 수보(修譜) 주문이 몰렸다."

―그동안 제작한 족보는 얼마나 되나.

"경주이씨 국당공파(菊堂公派) 파보(派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대략 600만부 넘게 찍었다. 일족(一族)의 뿌리와 가지를 모두 기록한 대동보(大同譜)가 500여종, 파보가 1500여종, 직계 가족을 기록한 가승보(家乘譜)가 900여종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자료보다 우리 자료가 더 많다. 한국의 성씨는 280여개, 파는 3400개쯤 된다고 한다. 한국 족보의 80% 이상을 여기서 낸 셈이다."

◇족보·고서 등 5만점… 역대 대통령 친필 휘호도

회상사 6층 회상문보원(回想文譜院)은 '족보 박물관'이다. 금천 강씨(衿川姜氏) 족보부터 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 세보(世譜)까지 900여 가문의 족보가 가나다순으로 서가에 꽂혀 있다. 각종 문집(文集)과 향교지(鄕校誌), 불서(佛書)와 고서(古書)를 포함하면 줄잡아 5만여점에 달한다. 박홍구의 아호를 딴 5층 춘전(春田)기념관에는 족보를 받은 문중에서 보낸 감사장과 선물로 받은 고서화, 병풍이 가득했다. 역대 대통령과 회상사의 인연을 되돌아보게 하는 친필 휘호도 여러 점 보였다.

"해평 윤씨(海平尹氏)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회상사를 직접 찾아 대동보 발간을 축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5년 문중 대동보 발간을 기념해 '화친(和親)'이라는 친필 휘호를 보냈다. 같은 고령 박씨라 그랬는지 선친은 박 전 대통령의 흑백 가족사진을 액자에 담아 사무실에 뒀다. 사진 속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교복 차림의 갈래머리 소녀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이던 1988년 '대도무문(大道無門)' 휘호를 보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넉 자는 1992년 민주당 대표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받은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은 따로 연락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족보 제작 과정에서 추억도 많았겠다.

"10여년 전만 해도 족보 인쇄를 시작하면 문중에서 개판식(開版式)을 성대히 치렀다. 돼지머리나 통돼지를 올린 고사상을 차렸다. 잔치가 따로 없었다. 작업을 마무리한 뒤에는 종판식(終版式)을 열고 막걸리 한 잔에 취했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다. 고통스러운 순간은 없었나.

"방첩대에서 선친을 불러 돈을 빼앗고 때리고 그랬다. 6·25 때 인민군에게 도움을 줬다며 트집을 잡았다. 그땐 그랬다. 지금이야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치욕에 떨며 죽고 싶다고 아들 앞에 눈물 보이던 선친을 보면서 분을 삭이기 힘들었다. 경쟁 업체에서 도끼를 들고 쳐들어온 적도 있었다."

◇약사·구청장… 가업을 외면했던 장남

창업자 박홍구는 3남 1녀를 뒀다. 가업을 잇는 박병호가 장남이고, 둘째 병석은 국회부의장(민주통합당 의원)이다. 은행 다니던 셋째 병민은 20여년 회상사 일을 도왔고, 막내딸 현숙의 남편은 대전 지역 변호사다. 박병호는 기술을 가르쳐 회사 일을 맡기겠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대전공고에 진학했다. 고교 2학년 때 그의 '반란'이 시작됐다.

―공업고교를 나와 약대를 다녔다.

"회사일 하는 게 솔직히 두려웠다. 공부해서 혼자 조용히 일하는 직업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대전공고 기계과 2학년 초부터 실습 시간을 빼서 공부했다. 원광대 약대를 졸업해 스물다섯 나이에 도립 충남홍성병원 약제과장으로 발령받았다. 2년 뒤 약국을 열었다. 개업한 뒤에도 선친은 여러 차례 가업 얘기를 꺼냈다. 그래도 나는 내 길을 걷기로 했다."

―시의원, 구청장 등 정치인으로 활동했는데.

"정치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약국 일 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쌀과 연탄, 이불 채를 갖다 줬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에겐 돈도 쥐어줬다. 주민들이 시의원에 나가라고 했지만, 권세욕 때문에 누굴 도왔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처음엔 그랬는데, 나중엔 자의 반 타의 반…. 아니 타의 반 쪽이 조금 더 강했다. 내 성격이 뭐 그렇다."

―구청장을 두 번 지냈다.

"1995년 초대 민선 대전 동구청장에 선출됐다. 그 다음에는 낙선했고, 2004년에 다시 당선됐다. 내 정치 역량은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정치에는 미련도 후회도 없다. 적성을 따져보면 행정이 더 맞는다. 직원들과 뭔가 만들어가는 게 좋았다. 원래 꼼꼼한 성격에, 차근차근 일하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 후리면서 판을 벌이는 정치는 솔직히 안 맞는 것 같다."

―막상 가업을 맡고 나니 어땠나.

"선친은 내가 구청장 할 때에도 편찮으셨다. 여든 가까운 나이에 치매 기운도 있었다. 구청장 마치고 회사 일 맡겠다고 하니 참 좋아하셨다. '회상사 장남'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데, 막상 들어오니 만감이 교차했다. 들여다보니 시설은 낡았고 직원들 퇴직금도 밀린 상태였다. 명성은 화려했지만 실속이 없었다. 호황기에 맞춘 시설이 방대했지만 족보 수요는 턱없이 부족했다."

―2층 사장실은 시간이 멈춘 것 같다. 6년 전 탁상 달력이 놓여 있다.

"2007년 1월 4일 회상사 대표로 처음 출근했다. 며칠 동안 2층 사장실을 썼다.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앉아 있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싶었다. 1층 사무실로 내려갔다. 문만 열면 바로 인쇄·제본 공장이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야 내 마음이 편했다."

―공장 곳곳에 갖가지 구호가 보인다. 누가 쓴 것인가.

"선친이 직접 붓을 들고 썼다. '머리가 없는 자, 지혜를 내 놓아라. 지혜가 없는 자, 땀을 내놓아라. 지혜도 땀도 없는 자, 조용히 물러가라.' 언제 읽어도 가슴이 뛴다."

―시대가 변한 것을 실감하는가.

"한창때는 직원 수가 150명을 넘었다. 인근 창고를 우리 물량으로 다 채울 정도였다. 지금은 30여명 정도다. 활자와 청타 시대를 지나 컴퓨터·디지털 조판으로 넘어갔다. 원스톱 조판 시스템을 갖췄지만 눈 뜨기 무섭게 기술이 변한다. 따라가기 정말 힘들다. 컴퓨터 한두 대 놓고 싼값에 주문받아 하도급에 재하도급을 주는 식으로 족보를 만드는 업자도 있다. 우린 그렇게 못 한다. 족보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빠른가'보다 '얼마나 정확한가'이다. 지금은 장인 정신에 제대로 값을 쳐 주지 않는 세상이다."

◇"족보는 민족사를 세분한 정사(正史)"

1993년 펴낸 '회상사 40년사'에는 족보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조상의 영육(靈肉)이 집약된 일가의 혈통사요, 일족의 전모를 밝히는 명세서(明細書)인 동시에 민족사를 세분한 한국의 정사(正史)다. 우리는 족보를 통해 조상의 사상과 업적 속에서 자아를 발견해 물질문명에 치우침 없이 정신문화 재건에 유념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어울려 사는 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광속으로 달려가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다. 족보는 어떻게 변신할 것인가.

"'전자 족보'가 나오는 시대지만, 솔직히 나는 최신 저장 매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종이에 인쇄된 족보는 보관만 잘하면 수백년이 흘러도 알아볼 수 있다. 디스크나 CD롬에 담긴 족보는 몇 년 뒤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지금 내 역할은 축적된 콘텐츠를 인쇄를 통해 지켜나가는 것이다. 회상사가 60년 가까이 버텨온 힘은 방대한 콘텐츠와 정확성에 있다. 이름에 쓰이지만 어느 인쇄소도 갖추지 못한 희귀한 벽자(僻字)도 700여개나 보유하고 있다."

―돋보기 끼고 교정 보던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다.

"지금은 컴퓨터로 조판하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던 문중 어르신들이 몇날 며칠씩 숙식을 함께 하며 교정 작업을 벌였다. 이름과 생년월일, 배우자와 자녀, 관직 같은 정보를 일일이 확인했다. 단 한 개의 오자(誤字)도 내지 않으려 목욕재계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원고를 들여다봤다. 요즘은 택배로 원고를 받아 교정 보는 경우가 많다. 기술이 발전했지만 오자가 나오는 것은 정성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족보 끼워넣기'를 부탁하는 이들이 있나.

"과거에는 그런 졸부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큰돈을 벌어 성공했지만 번듯한 집안 출신이라는 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중에 거액을 희사하며 대놓고 요구하기도 했다. 요즘 그런 사람이 거의 없는 걸 보면 '뼈대 있는 집안'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된 것 같다."

―도난 사고가 잇따랐다.

"회상문보원의 족보 자료를 일반에 공개했는데, 슬쩍 들고 가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출입문에 디지털 자물쇠를 채우고 천장에 CCTV까지 달았지만 재작년에 족보 수천 권과 족보 제작용 자료 필름 뭉치를 도난당했다. 수장고를 털리기도 했다. 경찰에선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대전시에 시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 달라고 요청했다던데.

"회상사에는 납 활자부터 필름, 최근의 컴퓨터 시스템까지 반세기 넘는 족보 제작 사료가 있다. 시 문화재로 지정되면 이런 자료가 흩어지지 않고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시가 추진하는 '효 테마공원'의 중요한 콘텐츠가 되지 않겠나."

―아들만 넷을 뒀다. 가업은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

"첫째는 약국 일을 돕고 있고, 둘째는 대기업 계열사에서 근무한다. 셋째는 방송일을 하고, 막내는 법대생이다. 적성을 보고 결정해야겠지만 지금 같아선 자식들에게 부담만 주게 될 것 같아 걱정이다. 2~3년 전쯤 부도를 맞을 뻔했다. 쓰러지지 않으려 이 악물고 버티고 있다."

―세계화·다문화 시대다. 족보를 성벌(姓閥)을 중시하는 봉건사회 폐습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피부색이나 국적을 따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찾아보자는 얘기다. 성씨 시조와 내 증조부모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근본을 알면 내 인생이 나만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현대인이 외로움을 더 많이 느끼는 건 뿌리를 잃고 흔들리기 때문이다. 족보는 고리타분한 고서(古書)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네트워크 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