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틀 깨고 색 넣어 '현대적 한국화' 모색

"'외롭게 와서, 혼자 간다' 즉 예술의 길은 험하고 고독하다는 뜻의 '고예독왕(孤詣獨往)'을 신조로 삼고 평생을 그려온 분."(제자 한국화가 이철주 중앙대 명예교수)

한국화단의 원로 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86) 화백이 25일 오후 1시 20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박 화백은 광복 후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첫 세대. 특히 광복 후 흑백 위주의 수묵화가 대세이던 한국화단에서 문인화 전통에 채색을 입힌 화풍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1927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난 박 화백은 1945년 당대의 화가 청전 이상범을 사사하고 이듬해 서울대 미술학부에 입학해 회화를 전공했다. 광복 후 한국화단은 일본 화풍을 걷어낸다며 색채를 배제하는 분위기였지만 박 화백은 "전통을 답습하는 건 의미가 없다. 전통을 딛고 일어나 창조해야 한다"며 먹과 채색을 배합해 개성적인 구도와 표현 방식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젊은 시절, 그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으로부터 들은 말이 바로 "작가는 고예독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5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채색 한국화 작품 '선소운(仙簫韻)'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화여대와 서울대 교수 등을 지내며 제자를 양성했다. 이종상·김병종·이철주 등 한국화단의 쟁쟁한 화가들이 모두 그에게서 배웠다. 박 화백은 1980년대 이후 과감히 군청색을 사용해 생명력과 힘을 강조했고, 이는 이후 그의 대표색이 됐다.

박 화백 작품의 주요 소재는 '소년'이었다. 1955년 '소년', 1980년대 작품 '류하(柳下)' 등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소년은 절개 있는 선비처럼 고고한 이상을 가진 존재로,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작가 자신을 투영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전(前)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박노수 화백은 깔끔한 문인화적 화풍과 감각적 색채를 대비시켜 우리 전통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라고 평했다.

박 화백은 2003년 1월 쓰러진 뒤 계속 병석에 누워 있었고,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회고전 '봄을 기다리는 소년'이 열렸다. 그가 30여년간 살던 서울 종로구 옥인동 고가(古家)가 1991년 서울시문화재자료 제1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 화백은 2011년 작품과 소장품 1000여점을 종로구에 기증했으며, 종로구는 이를 바탕으로 구립 박노수미술관 설립을 추진 중이다. 대한민국예술원상(1987), 은관문화훈장(1995), 삼일문화상(2000)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부인 장신애씨와 아들 찬규(KAIST 교수)·민규(국립해양연구원 연구원), 딸 진화(주부)·단교(주부)·가향(주부)·이선(전 시립미술관 큐레이터)씨가 있다. 탤런트 이민정씨가 외손녀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27일 오전 9시. (02)2227-7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