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공장이 '건축가'를 만났다… 도시의 표정이 밝아졌다

주유소·공장·중고등학교 교사(校舍)…. 그동안 건축적 배려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나 있었던 건물들이다. 디자인이나 사용 환경을 고려하기보다는 기능 위주로 싸게 짓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건물들도 건축가가 참여해 신경 써서 짓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동안 건축의 '사각지대'에 있던 건물들이 표정을 조금씩 바꾸면서 도시의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임재용(건축사사무소 OCA 대표)씨는 주유소를 상점처럼 건물 1층에 넣는 '옥내(屋內) 주유소' 연작을 해온 건축가다. 임 대표는 "건물들 틈에서 이 빠진 곳처럼 보이던 주유소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도시 스카이라인의 연속성을 보완하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그는 서울 장충동 서울석유 사옥(2008년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행운동(구 봉천동) 한유그룹 사옥(2010년 서울시건축상 우수상)에 이어 지난해에도 양재동에 옥내 주유소 건물을 완공했다. 이 건물은 빗금을 그은 듯한 사선 모양의 외부 구조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곳곳에 테라스 형태의 옥외 정원을 뒀다. "정유회사 사옥인 서울석유·한유그룹 건물과 달리 양재동 옥내 주유소는 일반 임대 건물이다. 건물 안에 주유소가 있어도 디자인과 환경을 면밀히 고려하면 상업시설로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

공장 건물을 건축가가 짓는 경우도 있다.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코라'는 지난해 대전시 대덕테크노밸리에 영풍전자 공장을 지었다. 코라 장은재 실장은 "작업 공간 옆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쾌적한 환경을 제공했다"고 했다. "공장이지만 샌드위치 패널(금속판 사이에 단열재를 넣은 소재)로 만든 가(假)건물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바람에 따라 외장은 견고한 느낌의 현무암을 썼다. OCA 임재용 대표도 태평양제약 공장의 증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기존 공장 옆에 들어선 새 건물의 말쑥한 외관이 공장이라기보다는 갤러리를 연상시킨다.

경쟁적으로 캠퍼스에 새 건물을 짓는 대학에 비해 천편일률적이었던 중·고등학교 건물도 변하고 있다. 공간건축은 지난해 개교한 서울 관악구 구암고등학교 신축 프로젝트로 서울시건축상 우수상을 받았다. 부지 가장 높은 곳에 운동장을 두고, 건물은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배치해 불리한 지형을 극복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건축가 배병길씨의 경북 김천시 김천고 증축은 80여년 된 옛 건물과 새 건물이 조화를 이룬 점이 돋보인다. 지난해 '한국건축가협회상 베스트7' 중 하나로 선정됐다.

주거 부문에서 건축가들의 작업은 대체로 단독주택에 집중돼 있었다. 최근에는 임대주택 등으로도 건축가의 참여가 확대되는 추세다. 신승수(디자인그룹 오즈 소장)씨는 지난해 서울 문정동에 SH공사 보금자리주택을 지었다. 31가구짜리 원룸 임대주택인 이 건물은 공동세탁실이나 거주자들을 위한 라운지 등 공용 공간을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말 열린 '한·일 현대건축교류전'에 전시돼 주목받았다.

김준성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장 등 기능 위주로 짓던 건축물의 경우, 시설이 부족했던 과거엔 건물을 짓는 것 자체가 급선무였지만 이제는 디자인이나 환경 같은 가치까지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만 디자인을 강조한 나머지 새롭고 튀는 디자인 자체가 목적이 될 가능성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