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 대부의 인재論… "출세할 청춘? 허드렛일 시켜보면 압니다"

"후계자를 잘 뽑고,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 시스템을 남겨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역할입니다. 회사 경영에서 악성 재고를 후임자에게 물려 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죠."

국내 유통업계 최장수 CEO인 이승한 홈플러스 회장(67)은 16년 만에 '대표이사' 타이틀을 떼는 소회를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2년 전부터 물러날 시기라고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당시 유통산업 환경이 유통규제법(유통산업발전법을 지칭)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어려운 시기에 물러나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2년 더 늦어졌습니다."

그는 홈플러스 창립기념일인 오는 5월 15일 삼성 시절부터 16년간 유지해왔던 대표이사 자리를 후배인 도성환 테스코 말레이시아 대표에게 넘기기로 했다.

―CEO 16년 업적을 자평(自評)하면.

"국내 유통산업의 수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유통업체 간 경쟁 문화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창고형 할인점만 있던 시절에 원스톱 쇼핑과 생활 서비스를 결합한 할인점을 열었고, 신선식품 산지 직거래를 도입했죠. 첨단 물류센터도 세웠어요. 모두 홈플러스가 처음 도입한 것들입니다. 다들 '실패할 것이다'고 했지만 결국엔 따라왔습니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벤치마킹을 하러 오고요."

―아쉬운 것은.

"홈플러스 창립 기자간담회 때 '업계 1위를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위를 목전에 두었지만 유통규제법 때문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골목상권과 재래시장 보호를 취지로 만들어진 유통산업발전법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해왔는데.

"지금의 법은 유통업체의 서비스 수준과 소비자의 선택을 규제하는 것입니다. 대형마트는 양호한 품질의 제품을 싼값에 팔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선택합니다. 규제법은 그런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합니다. 강제휴무로 대형마트 매출이 100이 떨어진다면 그중 10만 재래시장으로 옮겨가고 90은 아예 소비를 하지 않거나 다음 날 마트로 간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재래시장과 동네 구멍가게를 지원하는 법이 아닙니다. 감성적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팩트나 진실이 따라주지 않는 법입니다."

―법을 재개정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젠 주어진 법에서 현명하게 상생의 길을 찾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이 갈등을 어떻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느냐에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16년간 유통 CEO를 지낸 사람으로 유통업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디테일(Detail), 섬세함입니다. 저는 'Retail is Detail(소매업은 섬세함)'이라 종종 말합니다. 대충 해가지고는 소비자를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유통은 공간게임이기도 한데, 한정된 공간에 고객들이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상품을 넣어 판매하는 것이 유통입니다. 한 치의 공간에도 과학과 섬세한 터치가 들어가야 성공합니다. 두 번째는 반응의 속도입니다. 소비자의 변화에 누가 가장 빠르게 반응하느냐가 승패를 가릅니다. 한 발자국 빠르면 정말 좋고, 최소한 반 발자국만 빨라도 이기는 것이 유통산업입니다."

―CEO 자리에서 물러나도 하실 일이 많을 텐데.

"새로운 경영이론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삼성그룹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대표이사까지 해봤고, 영국 최고의 유통회사에서도 CEO를 해봤습니다. 동서양 경영 문화의 장단점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영이론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오는 5월 보스턴대학으로 건너가 100일 동안 그곳 교수들과 라운드테이블을 구성해 공동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새 경영이론의 요지는.

"서구 경영이론에서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이윤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사회에 대한 공헌이 경영의 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포함돼야 합니다. 이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않는 기업이 한계 이상으로 성장하려면 암초에 부딪힙니다."

―CEO로서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첫째는 순수함입니다.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결정,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면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또 남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타인의 능력까지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무한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출세하고 CEO 재목감이라고 판단되는 유형은.

"허드렛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찮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은 반드시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이 회장이 쓴 책을 보니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마케팅 팀장으로 있다가 유통계열사 패션 담당으로 옮겼을 때가 좌절의 순간으로 보였습니다. 이 회장에게 좌절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승용차가 나왔던 비서실 팀장에서 하루아침에 서울 동교동 철로 옆 창고 같은 건물에 용달차로 출근하는 자리로 옮겼습니다. 이직(離職)까지 고려했으니 정말 좌절의 순간이었죠. 또 8세인 아들이 죽었을 때, 아내가 암투병할 때가 내 인생 좌절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좌절은 터널과 같아요. 터널에는 반드시 끝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주저앉아버리면 나가지 못합니다."

―사회 진출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신을 위한 사색을 많이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것'에 대한 생각은 많이 하지만 '자신'에 대한 생각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내 집, 내 차가 무엇이냐는 생각은 유효기간이 짧습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깊게 생각하면 엉뚱한 길로 가지 않습니다."

☞14년만에 매출 12兆·업계 2위… '유통의 전설 '이승한은?

이승한(67) 회장은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대구 계성고와 영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해,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팀장, 삼성물산 건설 부문 개발사업본장 등으로 일했다. 1997년부터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를 맡았고, 1999년 삼성과 영국 테스코가 홈플러스를 합작해 만든 뒤부터는 CEO(최고경영자)로서 홈플러스를 이끌어 왔다. 홈플러스는 1999년 점포가 2개에 불과한 국내 대형마트 업계 12위로 출발했지만, 14년이 지난 지금은 전국에 133개 점포에서 12조원의 연 매출을 올리는 업계 2위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