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읽고 TV조선으로 본다] 1등 만화가, 덧 없더라… 그동안 놀고 자빠졌던 거지

작가 이현세(59)에게 궁금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실패로부터 얻은 교훈. 많은 사람이 그를 한국 최고 만화가로 떠올리지만, 차갑게 말하면 그는 이제 작품보다는 지평선을 응시하는 OB맥주 광고와 선홍색 니트의 유니클로 광고로 먼저 기억나는 유명 인사. 스타로서 인기를 소비하며 살 수는 있겠지만, 세계와 일대일로 대결해야 하는 창작자·예술가의 삶은 소모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을 그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또 하나는 좌절로부터 얻은 교훈. 일부에게는 알려졌지만, 이현세의 개인사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비극의 압축판이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일본 순사에게 총살당했고, 비극은 아버지 삼형제로 이어졌다. 6·25 당시 인민군 장교였던 둘째 삼촌 때문에 큰아버지는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했고, 셋째 집 장남이었던 두 살배기 현세는 딸만 있던 큰집에 양자로 보내졌다. 스무 살까지 모르던 태생의 비밀이었고, 실제 나이가 호적보다 두 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오늘 듣고 싶은 건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우선 첫째 교훈부터. 스타가 되면 작가로서 긴장감은 약해지는 법인데.

"'공포의 외인구단'(1983) 이후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았다. 너무, 너무 많이 유명해지고 바빠졌다. 세상이 정말 신나더라. '나는 만화가들의 본보기니까 화려하게 살아야 해'라는 식으로 합리화를 하더라고. 차도 제일 좋은 차, 저축보다는 멋지게 쓰자… 이런 식으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계기는.

"사인회에 갔는데, 아이들이 그려달라는 게 내 캐릭터가 아닌 거야. 까치나 엄지가 아니라 둘리, 일본 만화 드래곤볼을 그려달라 하더라고. 옆에 서 있는 엄마는 '대한민국 최고 만화가'라고 달래는데, 아이는 '난 싫어' 그러는 거야. 가시방석이었지. 한번은 설문조사를 해보니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만화가 1등은 여전히 이현세인데,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1~10등에 까치·엄지가 없어. 이현세는 남아있는데 실제 이현세 만화는 보지 않는 거지."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다?

"소송(표현의 자유 관련 '천국의 신화' 재판·1998~2003)한다고 시간 다 보내고, 그 사이 만화의 중심은 종이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가고, 문하생들 제작 과정도 수작업에서 디지털로 바뀌었지. 만화 잡지를 보면 나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는데 인기 순위 1위고 2위고 3위인 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지. 상스러운 말로 하면 '아 그동안 이현세 참 잘 놀고 자빠졌었구나…' 싶더라고. 그러면서 새로 그린 게 '이현세 만화한국사'였다."

―사랑받는 성취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창작과 학습 만화는 다른 영역 아닌가.

"(먼 산을 바라보다) 에이, 말하는 김에 다 해버리지 뭐. 이때 조사를 해 봤다. 돌아가신 정주영 어르신 이야기처럼 '내 편 다 어디 갔어?'(웃음). 가만히 보니까 내 독자들은 다들 엄마, 아빠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고 있더라고. 결론은 '부모가 추천해주는 책'이었다. 철학 만화를 하고 싶었지만 안 팔릴 것 같고. 한국사 만화가 여럿 있다면 이현세 한국사를 선택해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 지극히 전략적인 접근이었던 거다."

작가는 묻는 사람이 난처할 정도로 솔직했다. 어쩌면 그 덕목이 이현세의 미덕이자 약점일 것이다. 치밀한 기획이나 관리가 아니라 충동과 즉흥성을 바탕으로 한 선택과 행동. 이날 녹화 현장에서 그는 이념과 봉건적 가부장제의 희생자였던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털어놨다. 집안에서는 이현세가 스무 살 청년이 될 때까지 태생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친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가 친부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서커스의 피에로가 된 느낌이었다".

―비극적 개인사가 작가 이현세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끼친 대목도 있나.

"내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은하수처럼 장렬히 부서진다.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처럼 민족의 현대사를 얘기한 작품도 내 가족사로부터 출발했을 거다. 지금도 이렇게 웃고 떠들지만, 내가 가장 편할 때는 역시 약간 가라앉고 서글플 때다. 낮보다는 완전히 가라앉은 밤이 좋다. 작가로서는 도움이 된 부분도 있겠지."

―당신은 이념의 비극도 겪었다.

"고등학교 2학년, 불량 청소년이 되려고 할 때였다(웃음). 내 천둥벌거숭이 사촌 동생(사실은 친동생)이 우리 집에 와서 할머니가 숨겨놓은 북한 지폐를 몰래 학교에 가져간 거다. 인민군 장교였던 둘째 삼촌이 6·25 때 내려와 할머니에게 한 보따리 놓고 갔거든. 그런데 학교 선생님이 보니 지폐에 김일성 초상이 그려져 있는 거다. 선생님이 부들부들 떨면서 '이 돈 어디서 났어' 그러니까놀란 동생도 '주웠어요' 하고 거짓말하고. 나중에 할머니도 부들부들 떨면서 돈을 마당에서 다 태워버렸다."

―그러면 작품에서도 이데올로기는 피하게 되나.

"아무래도. 나는 신분이 불량하니까 이데올로기에 대한 만화를 그리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할 거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또 학교 반공 교육에서 배우는 빨갱이와 할머니가 얘기해주는 인민군 장교 삼촌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더라고. 이러니까 회색분자가 탄생하는 거지. 반대로 작품에서 이데올로기 얘기하면 그걸 팔아먹는 작가로 보일까 봐 더 피하고 싶고.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성숙했는지도 모르지."

성공보다는 실패가 사람을 단련시킨다. 올해는 이현세의 대표작 '공포의 외인구단' 30주년. 그리고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서 강의한 지 15년이 되는 해다. 올해 작가는 학교에서 1년 연구년을 받았다. 다음 달에는 중국으로 삼국지 인물 기행을 떠난다. '만화 한국사' 다음 프로젝트가 '만화 삼국지'다. 이 삼국지를 발판으로 새로운 창작에 도전하는 게 60대 이현세의 꿈이다. 그리고 일흔이 되면 정한 꿈이 있다. 동화를 그려주는 할아버지 만화가 이현세. 그 꿈이 성공하면 작가는 삼대(三代)를 잇는 작가가 된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읽은 독자가 할아버지·할머니가 되고, '만화 한국사'를 읽은 독자가 부모가 되며, 그들의 손주·자녀가 읽는 그림 동화의 작가. 비록 창작은 아닐지라도 70대의 만화가로서는 멋진 선택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실패는 그렇게 사람을 성숙시킨다.

채널 19·오늘 저녁 7시 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