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이맘때 전남의 한 바닷가 마을에 취재를 하러 갔다. 겨울 바닷바람이 여관의 창문을 쳐대는 통에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이튿날 축 늘어진, 몽롱한 몸뚱이는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커피 한잔 마시려고 읍내를 돌다 발견한 다방에 들어갔다. 담배 자국이 구석구석 새겨진 빨간 소파에 앉자 초로(初老)의 여인이 ‘다방 커피’를 갖고 왔다. 그리 뜨겁지도 않은 그 커피를 호로록 마시니 부드러운 단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몸이 온기를, 머리는 정신을 되찾았다. 시인 이상이 서울 종로에 다방을 차렸던 이유가 납득이 간다. 그의 시는 커피나 계란 띄운 쌍화차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다방은, 그렇게 힘이 된다. 하지만 옛 다방을 찾아보기가 어디 쉬운가. 외기 힘들 정도로 이름이 긴 커피를 납득할 수 없는 가격에 파는 프렌차이즈 카페는 한 골목에 두세 개씩 생겨나는데 다방은 그보다 더 빨리 사라지고 있다. 그 와중에 오롯이 자기 자리를 지켜온 다방들을 돌아봤다. 다방엔 세월만 쌓인 게 아니라 저마다의 이야기가, 그리고 인생이 쌓여있었다.
■ 전주 삼양다방
전주 경원동 동문로 한산한 뒷길. 하지만 과거 전북도청은 물론 전주시청과 법원, 우체국, 경찰서 등 관공서가 여기 다 있었던 번화가였다. 이 길 중간쯤에 허름한 4층짜리 건물이 있고, 1층에 '삼양다방'이란 간판이 붙어있다. 국내 영업 중인 다방 중 역사가 가장 긴 곳이다. 61년 전인 1952년 지금 자리에서 개업해 여태 영업 중이다.
통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왼쪽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유리격자창이 일단 낯선 이의 시선을 한번 걸러낸다. 유리격자창 앞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탁 트인 내부가 나온다. 12개 테이블에 2인용 '레자' 소파가 2개씩 붙어있다. 테이블 4곳에 앉은 손님들이 이방인들을 대놓고 쳐다본다. 다들 예순은 넘어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다.
입구 오른쪽 카운터에는 '티켓판'이 놓여있다. 넓은 직사각형 모양 윗면에는 작은 직사각형 모양 요철이 질서 정연하게 움푹 파여 있다. 테이블마다 주문한 내용을 빨강·초록 등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칩(티켓)으로 구분해 담아 놓던 도구이다. 벽에는 1988년 발행된 누렇게 빛바랜 영업신고증과 요금표가 달렸다. 영화에서 본 1960~70년대 다방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곱게 나이 먹은 여주인에게 "다방이 멋지다"고 하자, "멋지긴! 손님도 할아버지들밖에 없고"라며 핀잔을 주더니 그래도 친절하게 "여기가 따뜻하다"며 온풍기가 옆에 놓인 테이블로 안내했다. 따뜻한 보리차를 내온 주인이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왠지 이 다방에선 쌍화차를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잠시 뒤 주인이 짙은 갈색 찻잔에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쌍화차를 타서 가져왔다. 달걀노른자가 동동 뜬, 제대로 된 '모닝 쌍화차'였다.
잣, 땅콩, 대추도 노른자와 함께 쌍화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잔뜩 들어있다. 주인이 "식으면 비리니 뜨거울 때 마시라"고 한다. 노른자 띄운 쌍화차, 얘기는 들어봤어도 실제 마셔보긴 처음이다. 스푼으로 노른자를 입으로 밀어넣어가며 쌍화차를 마셨다. 노른자가 영양을 보충해줄지는 몰라도, 쌍화차 맛을 더 낫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지는 않는 듯하다. 1잔에 4000원. 다른 전통차도 같다. 커피는 2000원이다.
주인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문인·화가 등 예술인, 공무원 등이 드나들었지만, 요즘은 손님이 거의 없어서 문을 닫을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한 커피 관련 단체에서 이 다방 살리기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전북 전주 완산구 경원동2가 7-9, (063)284-7490
■ 대구 미도다방
동성로는 대구의 가장 번화한 곳이다. 쇼핑센터와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상점에서 쏟아지는 음악 소리가 귀를 때린다. 중앙시네마 옆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동성로의 번잡함과 소음이 차단된, 작은 골목이 이어진다. 그 골목 중 화교학교 근처의 '진골목'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는 경상도 말에 따라 ‘긴골목’이 ‘진골목’이 됐다고 한다. 100m 남짓한 이 골목이 옛 사람들에겐 꽤나 길어 보였나 보다.
진골목 한가운데 미도다방이 있다. 대구 최초의 양옥식 건물로 알려진 정소아과의원 바로 맞은 편이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빨간 저고리에 파란색 치마를 받쳐입은 여자가 자리를 안내한다. 1982년부터 이 다방을 운영해온 그는 이곳 손님들에게 ‘정인숙 여사’ 혹은 ‘정 여사님’으로 불린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나긋나긋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오는 사람에겐 다 찾아가 악수를 하고 안부를 묻는다. 매일 한복을 입고 다방에 나오기 때문에 “철마다 두 벌씩 해 입는 한복 값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오전 11시인데도 대여섯 명의 손님이 앉아있다. ‘정 여사’는 “한창때는 하루 1000명이, 요즘엔 하루 300명의 손님이 다녀간다”고 했다. ‘정 여사’의 미소와, 2500원짜리 차 한잔만 시켜도 과자와 생강, 설탕을 푸짐하게 내주는 그의 인심 덕이다. 약령시장이 다방 근처라, 약차와 견과류를 듬뿍 넣은 쌍화차(당연히 노른자는 띄운)도 맛나다.
가만히 앉아 손님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이 다방에서 찾은 작은 재미다. 어떤 이는 잘나갔던 시절 이야기를, 또 다른 이는 서울에 사는 딸과 손주 이야기를 한다. 고(故) 전상렬 시인의 시처럼,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미도다방’은 이들의 ‘질고 진’ 시간을 알뜰히 쓸어모은다. 대구 중구 종로2가 66-1(2층), (053)252-9999
미도다향
전상열
종로二가 미도다방에 가면
鄭仁淑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어떤 햇살은 가지 끝에 걸려 있고
어떤 햇살은 벼랑 끝에 몰려 있고
어떤 햇살은 서릿발에 앉아 있다
정 여사의 치맛자락은
엷은 햇살도 알뜰히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 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 시절 나비 이야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이야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이야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二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 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 벌이를 하고 있다
■ 광주 남선다방
빌딩에 들어섰을 때까진 다방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로비 관리인에게 묻자 “지하로 내려가라”고 한다. 운동장처럼 넓은 다방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1960~70년대 다방에 놓여있던 전형적인 붉은색 ‘레자’ 소파가 갈색 ‘호마이카’ 테이블 앞뒤로 나란히 정렬했다. 형광분홍빛 벽지를 곱게 바른 벽에는 연꽃·모란·산수(山水) 등을 주제로 한 동양화가 여기저기 걸려있다.
남선다방은 광주에 현존하는 최고(最古) 다방이다.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현재 사장인 김승희(67)씨는 6개월 전부터 운영하고 있다. 다방이지만 새알깨죽·새알호박죽·떡국 등 음식이 훌륭하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김씨가 사장을 맡고서 음식이 이름나게 된 것이었다. “옛 전남도청 앞에서 한정식집을 한 15년 했어요. 그러다 도청이 이전하면서 문을 닫고 5~6년 쉬었지요. 그러다 이 다방을 맡게 되었죠. 그런데 손님이 너무 없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그나마 매출을 올려 문 닫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음식을 내기로 했지요.”
관공서 앞에서 식당을 했다면 음식 솜씨가 보통은 아닐 터. 그런 김씨가 점심시간 주로 찾는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가볍게 식사할만한 음식으로 깨죽과 호박죽, 떡국을 생각해낸 것이다. 검은깨를 곱게 갈아서 진하게 죽을 쑨 다음 새알심을 넣었다. 호박죽은 직접 호박을 잘라서 만든다고 한다. 깨죽을 시켜봤다. 진하고 구수하고 고소한 것이 역시 예사 솜씨가 아니다. 커다란 국그릇 가득 담겨 나오는 인심도 푸짐하다. 죽에 딸려 나오는 동치미김치와 무나물도 훌륭하다. 생강차도 채 썬 생강이 찻잔 절반쯤이나 채울 정도로 넉넉하게 들어있다.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5가 152(남선빌딩 지하 1층), (062)224-6500
■ 수원 시인과 농부
‘시인과 농부’가 수원 팔달문 인근에 들어선 것은 1988년 무렵이다. 시, 클래식, 영화, 미술 등을 좋아하던 한 여인이 16.5㎡(5평)짜리 클래식 카페를 인수해 찻집으로 만들었다. “이름은 말해줄 수 없다”는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에게 직접 녹차잎, 감잎, 국화꽃, 오미자 등을 다듬어 만든 차를 내왔다. 가게 안에는 감명깊게 본 영화 포스터나 비디오, 마음을 울린 시집, 평생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클래식 음반, 신문에서 발견한 문화관련 기사를 두고 찾아오는 이와 공유했다. 테이블에 놓인 낙서장은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세월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해왔다.
‘시인과 농부’는 술이나 밥은 팔지 않고, 오로지 6000~7000원짜리 전통차만 판다. 3년 전에 담가둔 유자차는 맛이 깊고, 담근 뒤 3일간 얼려서 얼음을 띄워낸 감주는 달달하면서도 담백하다. 사흘간 푹 고아낸 대추차는 깊은 향이 일품이다. “달콤한 차 맛에 어울리는 게 짭조름한 감자”라며 노릇하게 쪄낸 알감자를 내주는 주인은 “한때는 중고등학생들이 떼로 와 차 한두 잔 시키고 감자만 계속 리필한 적이 있다”며 웃는다. 주인은 3개의 공간으로 나뉜 이 낡은 찻집을 손걸레로 닦아 윤을 낸다. 청소기나 마대는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걸레질을 하다 보면 이곳에 앉았던 사람을 생각하게 돼요. 그 사람은 어떤 고민이 있었길래 그런 표정이었을까? 다음에는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죠.”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2가 14, (031)245-0049
■ 대전 산호다방
대전 대흥동은 원(元)도심이다. 그 단어 뒤로 ‘쇠락했다’란 글자가 겹쳐 보인다. 그러나 대흥동을 기력을 다한 노인 취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젊은이의 심장을 간직하고 있는 노인이 더 어울린다.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던 이곳엔 세대만 바뀌었다 뿐이지, 여전하다. 이어 필방과 서예학원이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골목 구석구석에 갤러리와 소극장이 들어서있고,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산호 여인숙’도 사실은 게스트하우스 겸 전시 공간이다. 그리고 이곳의 한가운데 산호다방이 있다. 옛날 커피맛을 50년간 고수한 곳이다. 다방 메뉴는 전부 2000원이고 초코파이를 함께 내준다. 이곳은 종종 창작 프로젝트인 ‘원도심 프로젝트’의 일환이 되기도 한다. 대전시 중구 대흥동 489-9, (02)256-8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