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좀 써달라"… 요즘 은행 대부담당은 3D 직종

서울 강북에 있는 A은행 김모 지점장은 최근 한 중소기업 사장으로부터 "대출금 50억원을 한꺼번에 갚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제발 대출을 계속 써달라"며 통사정을 하고, 대출 금리를 0.5%포인트 더 깎아준 끝에 겨우 대출금을 갚겠다는 고객을 주저앉힐 수 있었다. 그는 "기업에 여유 자금이 넘쳐나면서 은행이 갑(甲)이고 기업이 을(乙)이라는 공식은 오래전에 깨졌다"고 말했다.

갑을 관계의 역전은 저금리가 본격화된 2000년대 초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중에 값싼 돈이 더 풀리면서 더 심화하고 있다. 은행은 낮은 금리에 예금을 받은 뒤 높은 금리로 대출해서 돈을 번다. 국내 은행 이익의 90%가량이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예금이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대출을 해서 굴릴 곳이 없으면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을이 되고, 돈을 빌리는 기업이 갑이 된 원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금융기관이 기업에 대출해 준 돈은 작년 4분기 석 달 동안 7조8000억원이 감소했다. 기업 대출이 줄어든 것은 2010년 4분기 이후 2년 만에 처음이다. 신규 대출을 안 받거나 기존 대출을 갚아버린 기업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B은행 지점장은 "여윳돈 있는 기업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발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자 부담이라도 덜자는 생각으로 은행 대출부터 갚는 경우가 많다"며 "경기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앞으로 대출 감소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기업 대출이 줄다 보니 은행이 예금으로 100원을 받으면 이 중 97원 정도만 대출로 나가고, 나머지 3원은 이자 없이 썩히게 된다. 2009년만 해도 예금으로 100원을 받으면 대출로 112원이 나갔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은행에서 전통적으로 '물 좋은 자리'로 불리던 대부(貸付) 담당은 서로 가기 싫어하는 보직이 됐다. 한 시중은행 행장은 "요즘 은행에선 아래·위 틈새에 끼여 고생만 하는 대리(代理), 연수나 장기 휴가를 간 직원의 일을 대신해 주는 대직(代職)과 함께 대부 담당이 '3D 직종'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예금 사양하는 은행들

대출할 곳이 마땅치 않다 보니 요즘 은행들은 예금 들어오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한 시중은행 자금 담당 부행장은 지난달 전체 행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예금 유치를 자제해 달라. 유동성이 풍부하니 대출 증가 속도에 맞추어 예금을 조절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이자 부담이 큰 거액 예금에 대해서는 은행들이 거절하는 사례가 많다. C은행 자금부장은 "최근 한 대기업이 1000억원을 3개월치 정기예금에 들겠다고 했는데 300억원만 받아주고 나머지는 사양했다"고 말했다. 개인 고객은 조달 금리보다 높은 금리를 줘도 신용카드나 보험·펀드 판매로 별도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기업 고객은 연 3%대 이자만 따먹고 더 이상 수익을 올려주지 않아 '돈이 안 되는' 예금 고객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시중에 자금이 부족할 때 은행들은 기업에 "대출을 해줄 테니 예금을 하라"며 '꺾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역전됐다. 기업이 은행에 "높은 금리로 예금을 받아주지 않으면 대출을 빼버리겠다"고 큰소리친다. 과거 기업들이 부담하던 저당권 설정 비용을 재작년부터 은행들이 부담하도록 제도가 바뀌자, 낮은 금리를 찾아 대출 은행을 수시로 바꾸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은행에 돈 빌려달라고 쫓아다니는 기업들도 있다. 문제는 이런 기업일수록 우량 기업이 아니라 부실이 우려되는 기업일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은행들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비(非)우량 기업에는 기존 대출을 거둬들이거나 만기 연장을 안 해주는 방식으로 '디마케팅(demarketing)'을 벌이고 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신용도가 떨어지면서 돈이 급한 중소기업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통에 일부러 사무실을 비우는 때도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