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탓에 직장 못 얻고… '베트남' 덕에 다시 배우로

나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여섯 살에 '황혼열차'(1957)로 데뷔하고 중학교 때까지 아역배우로 활동했지만, 그것은 부모님 뜻도 내 의지도 아니었다. 베트남어를 전공하던 대학시절 난 "지금까지 그렇게 흘러왔기 때문에 그렇게 흘러가는 건 싫다"고 생각했고, 전공을 살려 베트남에서 미래를 개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꿈은 베트남 공산화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졌다. 베트남엔 갈 수 없었고, 국내에서는 전공을 살려 취업할 길도 없었다. 남들보다 늦은 출발을 만회하기 위해 나는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배우뿐인 듯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를 본 것은 그 무렵이었다. 고향에서 평화롭게 지내다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세 친구의 삶을 통해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다룬 영화다. 전작 '택시 드라이버'(1976)에서 보여준 인상적인 연기의 로버트 드 니로는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 계기였다. '디어 헌터'에서 처음 알게 된 메릴 스트립은 감정 표현을 너무나 잘하는 배우였다. 크리스토퍼 월켄은 이후에도 여러 작품에 등장했지만, 이 영화만큼 연기 한 걸 보지 못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타 연주곡 '카바티나'는 지금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전쟁 신을 많이 넣지 않고도 전쟁의 고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러시안룰렛이 나오는 장면 외에는 대부분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임에도 그 느낌은 거대했다. "베트남에 가겠다"는 꿈이 무너진 뒤 베트남전을 다룬 국내외 영화를 여러 편 봤지만, 대부분 군인의 용맹함을 다룬 것들이었다. 반면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어조로 반전(反戰)을 이야기했다. "검열 등으로 제약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저런 영화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러움이 일었다. "더 나이 들기 전 베트남전 참전 군인 역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다. 그 소망은 1992년작 '하얀 전쟁'을 통해 이룰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성인이 되어 영화계로 돌아온 후부터 1990년대 민주화가 되기까지 내가 출연작을 고르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에는 만들지 못했던 영화, 할 수 없었던 이야기, 현실성 있고 사회성을 갖춘 작품을 선택하려 했다. 오락적인 영화도 했지만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처럼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영화를 골라왔다. 그것은 멜로드라마·문예영화·반공영화만 할 수 있었던 1970년대의 편견과 싸우는 일이기도 했다. 영화는 내가 평생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에 "영화하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과거의 편견을 깨뜨리고 싶었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선 이후로 어느덧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연기를 하면서, 유니세프 친선대사·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등으로도 일하고 있다. 내년이면 강릉에 문을 여는 영화박물관 관장까지 맡게 된다. 하지만 나는 배우다. 내 앞에 놓인 많은 일 중에서 제일 우선순위는 영화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다. 지금까지 보다 섬세한 연기를 하고 싶다. 춤으로 치면 살풀이처럼,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관객에게 커다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연기다. 반면 '연기하고 있다는 게 보이는 연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연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영화 ‘디어 헌터’(The Deer Hunter·1978)

미국의 마이클 치미노 감독이 연출했고,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한 영화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포로로 붙잡히고, 이 과정에서 얻은 충격으로 파멸해가는 세 젊은이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에 삽입된 스텐리 메이어스 작곡 ‘카바티나’는 이 영화를 통해 클래식 기타 명곡으로 떠올랐고 제51회 미국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크리스토퍼 월켄은 남우조연상을 받았다.